Wang Xiaoshuai의 2019년 영화 '나의 아들에게(So Long, My Son)'는 러닝 타임이 무려 3시간이다. 보고나서 내가 느낀 것은 그렇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나 길게 영화를 찍다니... 이 영화는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인물들의 내면을 따라간다.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뒤섞여서 흘러가기 때문에 관객에게 꽤나 집중을 요구한다. 과거의 커다란 슬픔과 상처를 지닌 인물의 내면은 현재까지도 황폐하고 쓸쓸하다. 영화는 나름대로 치유와 용서에 이르는 여정을 보여주고 싶어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피상적이고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야오쥔(왕징춘 분)과 리윈(융메이 분), 잉밍과 하이옌 부부는 국영 기업에서 오랫동안 친한 동료로 지내왔다. 그러나 야오쥔의 아들 싱싱이 잉밍의 아들 하오와 댐에서 놀다가 빠져 죽는 비극적인 일이 생긴다. 야오쥔과 리윈은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치듯이 그곳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아이를 입양해 싱싱이라는 이름으로 키운다. 그러나 삶은 결코 쉽게 풀리질 않는다. 고등학생이 된 새 아들 싱싱은 사고뭉치로 자라났다. 그럴수록 야오쥔의 마음속에는 죽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야 했던 아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정부의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아내 리윈은 억지로 중절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리윈의 임신 사실을 당국에 고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하이옌이었다. 그렇게 두 가족 사이에 얽힌 슬픔과 원망의 실타래는 깊다. 그로 인해 드리워진 과거의 그림자에서 그들이 벗어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중국 영화에서 6세대로 분류되는 왕 샤오슈아이는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Beijing Bicycle(2000)'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대도시의 주변부를 맴도는 소년의 일상을 통해 급변하는 중국의 현실을 담아낸 그 작품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6세대(Sixth Generation of the Cinema of China)의 감독들이 이전의 5세대로 대변되는 장예모, 첸카이거와 차별되는 지점이라면 개혁 개방 시대의 중국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담아냈다는 것이다. 6세대에 속하는 Li Yu의 'Dam Street(2005)', 'Lost in Beijing(2007)'에는 개혁 개방 시기를 지나는 중국의 시골과 도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그렇게 초기작에서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당국의 정책 기조에 적당히 타협하고 안주하면서 그들의 영화에서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는 사라진다. 아마도 중국 내에서의 영화 제작 현실이 그만큼 녹록지가 않기 때문이리라.
'나의 아들에게'에 나오는 두 가족의 얽히고 설킨 애증의 역사에서 당시 정부 당국의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비판은 보기 어렵다.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거리낌없이 생명을 거두는 강제적인 산아제한 정책은 거의 국가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왕 샤오슈아이는 그 문제와 직면하는 것을 회피한다. 그것을 리윈의 임신 사실을 고발한 하이옌 개인의 고통스러운 속죄의 차원으로 돌려버리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하이옌은 자신의 아들이 리윈의 아들 싱싱을 죽게 만든 것에 더해 리윈이 낳을 수 있는 또 다른 아이의 출생을 막았다는 것에 평생을 두고 죄책감을 갖는다. 죽음을 앞둔 하이옌이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 택하는 방식도 개인적인 참회와 야오쥔과 리윈 부부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3시간에 이르는 영화의 마지막 여정에는 용서와 축복이 자리한다. 그렇게 그 두 부부의 기나긴 고통의 시간은 화해로 마무리된다.
누군가에게 그러한 결말은 어둡고 힘들었던 폭압의 시대를 견뎌낸 인간 본성의 고결함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움을 복수로 되갚지 않고, 인내와 사랑으로 삶의 고통에 맞선 야오쥔과 리윈의 삶에 그 누구라도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건 정부 당국에서 예산 받아 만든 문예 영화 같다. 그들 부부는 그 오랜 아픔의 세월 동안 큰소리를 내거나 고통을 토로한 적이 거의 없다. 아마도 폭풍같았던 문화 혁명기, 1980년대의 개혁 개방의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대다수 민중의 삶은 생존 그 자체가 제일 중요했을 것이다. 비바람을 견디는 풀처럼 눕고 또 눕는 삶. 아들의 죽음을 잊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다가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서야 아들의 무덤을 찾아와서 눈물을 삼키는 부모의 모습. 그들 부부의 삶에 가해졌던 역사적인 과오는 개인의 덕성과 시간에 의해 묻혀진다.
주인공 야오쥔과 리윈 부부를 연기한 왕징춘과 융메이는 이 영화로 각각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좋은 연기이기는 했으나, 솔직히 두 주인공의 감정선에 깊이 공감하는 것이 내게는 어려웠다. 영화제 수상에도 지역과 국가에 대한 안배라는 것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아들에게'를 오늘날 중국 영화가 거둔 예술성의 쾌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그 한계를 명백히 드러낸다. 중국 영화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직면하는 데에서 유형 무형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창작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중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모옌(莫言,Mo Yan)의 소설 '개구리(蝸)'를 떠올렸다. 그 작품에는 무지막지한 산아제한 정책의 선봉장에 섰던 여성 의사가 나온다. 모옌의 소설은 그 엄혹했던 시절을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여기에도 개인의 반성과 참회는 나오지만 국가와 당국에 대한 비난은 슬그머니 뒤로 빠져있다. 오늘날 중국에서 어떤 식으로든 생존하고 성공한 창작자들은 그렇게 과거가 드리운 어둡고 긴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않다. 마찬가지로 왕 샤오슈아이의 '나의 아들에게' 또한 그 그림자를 감상적으로 그려내고, 폭압의 시대를 비판하기 보다는 우회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영화의 감동을 인위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 3시간은 눈물을 짜내기 위한 영화적 낭비처럼 느껴진다.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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