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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현대사를 반추하는 지아장커의 두 영화, 山河故人(2015)과 江湖儿女(2018)

  

  광산 도시 다통의 범죄 조직 보스 빈은 차오와 연인 사이이다. 둘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만, 그 사랑은 곧 위기를 맞는다. 빈의 조직을 삼키려고 경쟁 조직은 자객들을 보낸다. 연인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자 차오는 빈의 총으로 그들을 위협한다. 차오는 총기의 출처에 대해 함구한 댓가로 5년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다. 세상 밖으로 나와보니, 남자에게는 애인이 있고 여자한테는 '우리 인연은 끝'이라고 말한다. 여자와 남자의 사랑은 거기에서 정말로 끝난 것일까? 

  '江湖儿女'의 영어 제목은 'Ash Is Purest White'와 'Sons and Daughters of Jianghu', 이렇게 두 가지가 존재한다. '재는 가장 순수한 흰색이다'와 '강호의 아들과 딸'이라니,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제목들에는 어떤 뜻이 있는 걸까? 아마도 서구의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가장 어렵고 까다롭게 다가올 개념은 '강호(江湖, Jianghu)'일 것이다. '강호아녀'를 본 서구 비평가들의 글을 보면, 그들에게 이 영화에 내재된 문화적 코드를 해석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강호'는 무엇일까? 무협물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그 단어는 매우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무협 영화도 아닌 현대 중국을 그려낸 이 영화에서 '강호의 아들과 딸'이라니, 영화의 제목 '강호'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강호'라는 단어의 기원은 중국의 고대 신화와 전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교 철학에서부터 시작된 신선계(
)의 개념, 이것은 점차로 모험과 방랑을 의미하는 이상화된 공간으로 변모했다. '강호'가 중국인들의 삶에 깊숙이 파고든 것은 명청(明清)시대였다. 강호를 배경으로 활약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지배 권력은 그런 소설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정통 사회 구조에 저항하고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험의 세계로 떠나는 인물들을 미화하는 이야기는 사회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다. 중국 공산당에게도 '강호'는 배척의 대상이었다. 여기에서의 '강호'는 공식적인 사회 바깥의 모든 사회 구조를 통칭하는 것으로, 공산당은 그 어떤 '강호 민간 결사'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그러니까 개인과 개인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비공식적인 사회 연결망 전부를 부인한 것이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중국인들은 인정과 의리, 여러 다양한 이익 관계가 얽힌 사적 연결망 속에서 개인과 집단의 생존을 도모해왔다. 왕조나 지배 계층이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들의 답을 그런 '강호' 세계에서 만난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찾았던 것이다.

  '강호아녀'에서 빈이 지배하는 세계는 마피아나 삼합회 같은 범죄 조직과는 궤를 달리한다.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는 현재의 중국 사회에서 폭력 조직은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영화 속 빈의 조직은 명확하게 규범화되고 엄격한 폭력 조직이 아니라, 형제의 예로 맺어진 다소 느슨한 '강호' 결사체이다. 지아장커는 '강호'라는 개념을 서양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면서 그렇게 말했다(filmmakermagazine.com과의 인터뷰 참조). 영화 초반부에 빈과 차오, 조직원들은 새해 인사를 하면서 커다란 대야 같은 그릇에 여러 종류의 술을 한꺼번에 붓고 나누어 마신다. 아마도 이런 유형의 정서적 연대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삼국지의 '도원결의'에 해당할 것이다. 생판 남남인 이들이 형제와 가족 같은 존재가 되는 것. 거기에는 함께 하는 동안 서로를 지켜주고 보살펴 준다는 무언의 합의가 내재되어 있다.

  지아장커는 '강호아녀'의 두 사람, 빈과 차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그 '강호'의 인간적인 소중한 가치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탐색한다. 차오는 사랑하는 남자의 목숨을 지키고, 그의 미래를 위해서 5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다. 그런 차오와 달리 빈은 자신의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한때 폭력 조직을 이끌었던 남자는 화력 발전소의 책임자가 되어있다. 차오가 빈을 만나러 가는 길에 탄 2006년의 유람선에서는 삼협댐의 건설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마치 외국의 유명 관광지처럼 꾸며진 도시의 거대한 중앙 공원에서 차오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한다.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는 것'처럼, 차오가 유람선에서 바라본 그 모든 풍광은 이후 지어질 삼협댐에 다 잠길 터였다.

  강과 호수, 강호의 외관이 변한 것처럼 사람도 변했다. 유람선에서 차오와 같은 객실에 있었던 여자는 차오의 돈을 훔쳐 달아난다. 차오는 비싼 음식점에서 무작정 낯선 남자에게 접근해 여동생이 댁의 아이를 가졌다며 돈을 뜯어낸다. 빈의 발전소가 있는 외진 곳에 가기 위해 탔던 오토바이 기사는 차오를 강간하려고 한다. 일상화된 몰염치와 범죄. 지아장커는 물밀듯이 밀려온 자본주의의 공세에 황폐해진 중국인의 내면을 직시한다. 차오의 연인 빈도 그렇게 차오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다.

  2006년에서 다시 시간을 건너뛴 2017년, 차오는 역에서 빈과 마주한다. 빈은 반신불수가 되어 휠체어에 앉아있다. 다통에서 예전에 빈이 차지했던 지위는 차오의 것이 되었다. 예전에 빈의 것이었던 도박장을 운영하며 여주인으로 살아가는 차오는 빈의 치료를 위해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한다. 빈은 차오의 도움을 받는 자신의 처지에 모멸감을 느끼지만, 차오가 보여주는 빈에 대한 감정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또한 빈과 차오가 연인이었던 2001년의 '강호' 세계는 2017년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때도 도박장 중앙에 모셔져 있던 '관우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며, 조직원들은 차오를 깍듯이 '보스'로 모신다. 변한 것이 있다면 차오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과 도박장 입구에 설치된 CCTV의 존재이다.

  지아장커는 그렇게 빈과 차오의 지난한 사랑 이야기를 날실로, 중국 사회의 변화를 씨실로 엮어 한 폭의 옷감을 짜간다. 그의 전작 '산하고인(山河故人, 2015)'에서도 이러한 이야기 구조가 동일하게 구현된다. 석탄 채굴이 주산업인 산시성 펀양을 배경으로 여주인공 타오의 고통스런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1999년에서 아직 오지 않은 가상의 2025년에 이르는 시간을 관통하며, 영화는 자본주의와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중국인들이 잃어버린 가치를 응시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난하다는 이유로 저버린 타오는 돈 많은 남자를 선택하지만, 그것은 이후 이어질 길고 오랜 외로움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이혼한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호주로 이민을 떠나며, 타오의 장성한 아들은 엄마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 영화의 제목 '산하고인'은 산천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한 사람에 대한 마음도 변치 않고 지키겠다는 뜻이다. 영문 제목 'Mountains May Depart'에는 '비록 산들이 움직일지라도 그대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뒷문장이 생략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영화에서 타오가 즐겨듣는 Sally Yeh(엽천문)의 노래 '珍重(Take Care)'에서 반복해서 재생된다. 헤어지는 연인을 향해 평생을 다해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이 노래는 '강호아녀'의 차오의 빈에 대한 마음과 기이하게 겹친다. 지아장커는 차오의 사랑을 통해 '강호'의 인간적 가치를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제 '강호아녀'의 영어 제목에 담긴 뜻을 풀 차례이다. 'Ash Is Purest White'는 화산 폭발 후에 남은 재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결정이듯, '강호'를 지탱하는 신념과 정서는 시대의 변화에도 살아남음을 의미한다.

  지아장커의 영화들에서 개인은 결코 사회보다 더 커질 수 없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사회의 압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개인'의 이야기는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이다. '산하고인'과 '강호아녀'에서 그는 사랑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중국의 현대사를 성찰한다. 자본주의와 함께 서구문물이 중국인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지아장커는 비중있게 다룬다. Villiage People의 'YMCA(강호아녀)'와 Pet Shop Boys의 'Go West(산하고인)'는 영화의 주요한 테마로 기능한다. 그는 그 모든 변화의 세례를 받은 자신의 세대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중국인의 삶은 진정으로 행복한가', 하고... 마치 바둑 기사가 시합이 끝난 후 자신의 대국을 복기하듯 지아장커는 영화를 도구로 자신의 시대를 반추한다. 그리고 관객은 그의 영화를 통해 중국의 그늘진 내면을 들여다 본다.  

 
 

* 두 영화의 주연을 맡은 자오타오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다. 지아장커의 아내이기도 한 자오타오는 캐릭터를 체화한 배우의 연기가 어떤 것인가를 그 자체로 입증한다. 북경 댄스 아카데미를 졸업한 자오타오의 실력은 두 영화 속 팝송에 맞추어 춤추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출처: ny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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