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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들여다 본 시대의 음울한 내면, 포스트맨(郵差, Postman, 1995)

 

  영화는 사람 키만한 커다란 우체통이 설치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북경의 우편배달부 샤오두는 상사로부터 새로운 구역의 배달 업무를 부여받는다. 전임 집배원은 배달해야할 편지들을 몰래 뜯어본 혐의로 체포되었다. 매우 내성적이고 다른 이들과 그 어떤 교류도 하지 않는 샤오두는 결혼한 여동생 부부와 살고 있다. 여동생은 신혼집을 구해놓고도 오빠를 떠나지 못한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뜬 후로 둘은 어린 시절부터 의지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 우연히 뜯어서 보게 된 편지 한 장을 시작으로 샤오두는 몰래 남들의 편지를 뜯어서 보는 것이 일과가 된다.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편지의 사연을 읽고 자신의 맘대로 답장을 위조해 보내기도 한다.

  '포스트맨(郵差, 1995)'은 중국 6세대 감독 허지엔준의 2번째 장편 영화이다. 이 영화는 촬영은 중국에서 했으나, 후반 작업은 해외에서 해야만 했다. 중국 정부의 검열에 걸려서 작업을 더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영화는 9년이 지난 2004년이 되어서야 해금되어서 자국에서 상영을 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었길래 그랬을까? '포스트맨'은 매우 불편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샤오두가 배달해야할 편지를 몰래 뜯어서 읽는 행위 자체도 문제가 있는데, 편지의 인물들과 내용들도 예사롭지가 않다. 매춘부의 사랑 이야기, 동성애자들의 마약 중독 문제, 이런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중국 정부 당국이 진짜 열받을 만했겠구나 싶기도 하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읽기 시작한 편지들은 샤오두를 점점 더 비윤리적인 행동에 둔감하게 만든다. 죽은 아들의 소식을 모르는 노부부에게 아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편지를 써보낸다. 편지의 사연으로 여자의 직업이 매춘부라는 것을 알고는 스토킹을 하기도 한다. 관음증은 타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더 나아가 샤오두는 여동생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까지 품게 된다. 감독 허지엔준은 정말 갈데까지 가 보자는 생각이었을까?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불쾌함과 혼란을 안겨준다. 거기에는 불친절하고 모호한 서사도 한몫을 한다.

  샤오두가 읽는 편지의 사연들은 특정되지 않은 여러 목소리들로 재생된다. 관객들은 편지의 인물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편지 훔쳐읽기에 중독된 그는 점점 더 대담해진다. 매춘부와 게이의 집을 직접 찾아가보는 패기까지 보이는데, 샤오두의 방문을 받은 그들도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마약 중독자 게이는 샤오두에게 마약의 느낌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포스트맨'은 마치 북경이란 도시의 더럽고 음침한 지하 하수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이 도시 사람들의 비밀을 보여주겠어요, 그건 말이죠... 허지엔준은 '편지'라는 소재로 관객들을 그 비밀의 미로로 안내한다. 관객들은 절제되지 않은 욕망의 일그러진 면면을 확인하게 된다.

  1995년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는 이 영화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포스트맨'은 같은 해, 데살로니키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싱가포르 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나는 이 영화가 좋은,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촬영과 사운드는 저예산의 단점을 여실히 드러내며, 서사는 파편화되면서 길을 잃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중국 정부의 검열 정책에 맞서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와 맞닿아 있다. 그 점만이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는 덕목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상사는 샤오두에게 배달 업무를 잘 해냈다며 다른 구역을 더 맡긴다. 그곳은 새롭게 지어진 번화한 상업지구이다. 영화의 처음처럼 마지막도 샤오두가 설치하는 우체통이 보인다. 도시는 커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더 많이 모일 것이다. 어쩌면 샤오두가 설치하는 우체통은 차마 말하지 못한 은밀하고 고통스럽고, 더러운 욕망들의 집합소를 상징하는 것인지 모른다. 허지엔준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본 시대의 음울한 내면을 '포스트맨'에 담아냈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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