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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봄을 기다리며, 입춘(立春, And the Spring Comes, 2007)

 

  별 볼 일 없는 작은 도시의 음악학교 성악 강사로 일하고 있는 왕차이링(장웬리 분)은 아주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파리 오페라단에서 프리마 돈나로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추녀까지는 아니지만 왕차이링의 외모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지저분한 피부와 작달만한 키, 살집있는 몸매는 오페라의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목소리만큼은 곱고 아름답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은 베이징으로 거주지를 옮기려고 애를 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주증(居證)이 필요한데, 이미 거액의 돈을 건네준 베이징의 브로커는 늘 기다리라는 말만 한다. 그런 왕차이링의 주변에 모여든 이들의 인생도 허섭하기는 마찬가지. 시시한 재능을 가진 화가 지망생, 그곳 사람들에게 냉대받는 게이 발레리노, 왕차이링의 목소리에 반해서 쫒아다니는 공장 노동자까지. 과연 왕차이링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빛을 볼까...

  꾸창웨이(顧長衛, Changwei Gu) 감독의 2007년작 '입춘(立春, And the Spring Comes)'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주변부에 자리한 이들이다. '예술가병'에 걸린 그저그런 인생들이 현실에서 바스라지는 모습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병'과 비슷한 '영화병'이라는 것도 있다. 자신이 가진 예술과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병. 그 병에는 별다른 치유책이 없다. 성공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개는 청춘의 시간을 내던지다 망가지고 잊혀진다. 어쩌면 '입춘'의 주인공 왕차이링도 그 '예술병'에 걸린 사람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세월'과 '현실'이 그것이다. 흘러가는 시간과 엄혹한 현실이 어설픈 기대와 희망을 깨부수어 버린다.

  왕차이링이 가진 재능이 보잘 것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부르는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Tosca)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듣다 보면, 그 절절함이 마음을 울린다. 사랑하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비운의 여주인공이 신 앞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 신실한 믿음으로 착하게만 살아온 토스카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토스카처럼 왕차이링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비통함을 드러내듯 그 아리아를 자주 부른다. 사랑했다고 믿은 남자에게는 모욕적으로 차이고, 게이 발레리노에게서는 위장 결혼을 제안받는다. 왕차이링의 인생에 도무지 볕들 날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꾸창웨이 감독은 시련과 좌절의 연속인 왕차이링의 인생에 섣불리 희망을 선사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이 여자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꿈을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고, 여자는 주변의 비웃음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사기까지 당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예술에 매혹당한 것이 잘못인가? 그리고 그것에 인생을 바쳐서 살겠다는 꿈이 무모하기만 한 것인가? 왕차이링이 영화 속에서 부르는 성악곡 가사는 한결같이 아름답다. 노래의 날개 위에 연인을 태우고 가고 싶다는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 봄에는 가난한 마음의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는 슈베르트의 '봄의 찬가'. 그 고결하게 빛나는 가사들과는 달리 왕차이링의 현실은 그야말로 '시궁창'이다.

  어디 왕차이링 같은 낙오자가 한둘이겠는가? 화가 지망생은 너절한 사기꾼이 되고, 게이 발레리노는 감옥에 갇힌다. 그렇게 주변부를 맴도는 시시껍절한 인생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짠해진다. 예술이 그들의 인생을 망친 것인지, 삶이 예술을 버리게 만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당신들 말야, 그 정도의 재능으로는 어림없지'라고 조롱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러한 꿈을 가진 이들의 마음 깊이 흐르는 열정마저 폄하할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은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추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르는 왕차이링이 나온다. 그건 꾸창웨이 감독이 극중의 왕차이링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꿈을 그렇게나마 이루게 해주고 싶었던 감독의 따뜻한 연민은 마음을 울린다. 자신의 딸에게 나방의 짧은 삶에 대한 동화를 읽어주던 왕차이링은 사람은 그 보다는 행복하지 않냐고 말한다. 왕차이링에게 예술은 짧았고, 살아야할 인생은 길었다. 매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버리는 봄이 늘 슬펐던 왕차이링에게 딸과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인생의 봄인지도 모른다.

  장예모, 첸 카이거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꾸창웨이 감독은 '공작(Peacock, 2005)'으로 주목을 받았고, 이 영화에서도 아주 좋은 연출력을 보여준다. 여주인공 역을 맡은 장웬리는 그의 아내로, '입춘'으로 2007년 로마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 속의 왕차이링은 '박색(色)'에 가깝지만, 그것은 영화를 위해 일부러 살을 찌우고 분장한 모습이다. 영화제 수상 사진을 보고 다른 사람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실제로는 매우 아름답다.  


*사진 출처: moviedoub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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