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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고 접혀진 삶의 날개, 공작(孔雀, Peacock, 2005)

 

  어떤 영화들은 보고 있노라면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다소 벅차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무언가 보는 이의 내면을 건드리기 때문인데,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 어떤 의미로든 허탈함과 비애감을 느끼게 된다. 꾸창웨이 감독의 2005년작 공작(孔雀, Peacock)은 문화 대혁명이 끝나가던 무렵, 1970년대 어느 소도시에 살던 일가족의 삶을 펼쳐놓는다. 아직 문혁의 정치적 여진이 남아있는 어수선하고 침체된 시대적 분위기는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러나 꾸창웨이 감독은 최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인물들의 이야기와 정서에 집중한다.

  평범한 소시민 부부에게 세 명의 자녀가 있다. 영화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서사가 진행되는데, 맨 처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딸 웨이홍이다. 동네에 잠시 주둔한 낙하산 부대를 보며 새로운 인생을 꿈꾸던 웨이홍은 지원서를 내지만 탈락한다. 웨이홍은 크게 상심하지만, 지긋지긋하고 괴로운 삶의 출구는 도무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동네 제약회사에서 약병이나 닦으며 사는 것은 견디기 힘든 모멸감만을 안길 뿐이다. 결국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탈출구를 찾는다.

  두번째 이야기는 바보형 맏이 웨이구오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이런 방식은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1950)'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되며 커다란 그림을 향해 나아간다. 다소 떨어지는 지능과 비만한 체구 때문에 남들에게 놀림받고 얻어맞는 그의 삶도 결코 녹록지 않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들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쳐서 그만두게 된다. 웨이구오는 엄마가 맺어준 다리 저는 아가씨와 결혼해서 포장마차로 그럭저럭 먹고 살아간다.

  마지막 이야기는 막내의 몫이다. 웨이창은 바보형 때문에 학교에서 왕따 신세로 괴롭게 지내다 쥐약을 타서 형을 죽일 생각까지 하게 된다. 늘 형만 감싸고 도는 부모에 대한 불만으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가출해버린 후 가족과는 연락을 끊은 웨이창. 오랜 시간이 흘러서 손가락 하나를 잃고, 애 딸린 여자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돌아온 집에는 이혼한 누나가 부모와 지내고 있다.

  이 영화는 원래 4시간 분량이었던 것을 극장판으로 편집하면서 2시간 25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이야기가 중간 중간에 약간씩 비어있다는 느낌을 준다. 딸 웨이홍이 낙하산 부대에 지원했다 떨어진 후에, 직접 만든 엉성한 낙하산을 자전거에 매달고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웨이홍이 낙하산을 재봉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볼 수 없다. 인물들이 들려주어야할 긴 이야기들이 그렇게 잘려나가다 보니, 영화는 마치 레코드 판에서 갑자기 튀는 부분처럼 툭툭 끊긴다. 어떤 면에서는 세 남매가 마주한 막다른 삶의 골목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영화 '공작'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열렬히 소망하고 갖고 싶어했던 것들, 사랑도 일도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매번 만나는 닫힌 삶의 문 앞에서 대충 타협하며 돌아서기를 반복한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영화의 마지막에 세 남매는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동물원 나들이를 한다. 그들은 공작새 우리를 지나가면서 공작의 화려한 날개를 보길 기대하며 갖은 애를 쓴다. 그러나 공작새는 그들에게 날개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이 화면에서 모두 사라진 후에 비로소 공작은 찬란한 빛깔의 날개를 천천히 펼쳐 보여준다.

  상처입고 접혀진 어떤 날개들은 결코 펼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인생의 많은 일들이 그러하다. 가진 야망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 거듭 좌절하는 웨이홍, 어딜 가나 바보 취급에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버겁기만 한 첫째 웨이구오, 바보형에 대한 수치심으로 삶 자체가 어그러져서 되는대로 사는 막내 웨이창, 그들 삼 남매가 가졌던 꿈의 날개들은 그렇게 세월 속에서 부러져 접힌 상태이다. 그들이 결코 볼 수 없었던 공작새의 날개처럼 삶의 아름다운 빛깔을 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정말로 많은 이들 또한 자신이 지나온 삶에서 그렇게 펼쳐지지 않은 날개들을 발견한다. 

  장예모,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꾸창웨이 감독은 자신의 첫 작품인 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연출자로서 인물들의 감정을 충실히 끌어내는 역량이 돋보였을 뿐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도 좋았다. 영화에서 둘째 웨이홍 역을 맡은 장징추의 연기는 신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깊이있고 노련하다. 무려 1000명의 지원자를 제치고 뽑힌 이 여배우는 '공작'으로 대스타로 발돋움한다. 더하여, 작곡가 도우 펭이 담당한 영화의 음악은 비감하면서도 아름다워서 영화와 함께 긴 여운을 남긴다.  


*사진 출처: moviedoub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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