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후 새로운 젠더 규범의 정의, Somewhere in the Night(1946)
영화는 병실에서 이제 막 의식을 찾은 남자의 시점 쇼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얼굴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 때문에 붕대로
칭칭 감겨있다.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관객은 이 남자에게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퇴원 후, '조지 테일러'란 이름으로 제대한 그는 물품 보관소에서 찾은
가방에서 '래리 크라바트'가 남긴 쪽지를 발견한다. 자신은 조지 테일러가 맞을까? 래리 크라바트는 또 누구인가? 래리 크라바트를
찾아가는 남자의 여정에 수상한 이들이 계속해서 들러붙는다.
조셉 멘케비츠 감독의 'Somewhere in the Night(1946)'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퇴역 군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화 내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에 제작된 이 필름 느와르 영화는
전쟁이 미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분명히 미국은 압도적인 승전국이었으나, 그것이 아무런 상처가 없는
영광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영화 속 주인공 조지 테일러는 기억을 잃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전쟁은 모두에게 혹독한
것이었으며 특히 남자들, 참전 군인에게 큰 상흔을 남겼다. 영화 속에서 기억상실증으로 고통받는 조지 테일러의 모습은 그 한
단면이다. 그는 입대 직전에 자신이 머무른 것으로 되어 있는 호텔에 가서 기억을 되살리려 한다. 그를 응대하는 프런트의 나이든
직원은 호텔 벨보이들이 전쟁으로 모두 입대해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이 제대 후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모든 군인들의 사회 적응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전쟁으로 단절된 경력의 남성들은 당연히 이전의 사회적
위치를 회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주인공 조지 테일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의문, '나는 누구인가'는 그들이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실존적 과제였다. 남자들은 군인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또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빠르게 변모해야 했다. 그러한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압박감은 영화 속 조지 테일러를 괴롭히는 '기억상실증'으로 나타난다.
조지 테일러는 자신에게 의문의 쪽지를 남긴 래리 크라바트가 미국으로 들어온 나치의 비밀 자금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속에서 그가 겪는 모든 곤란은 바로 그 돈의 행방과 관련되어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는 머리를 쥐어짜내가며 래리
크라바트와 조지 테일러의 관계에 대해 알아 내려고 애를 쓴다. 물론 그것은 그 혼자만의 힘으로는 알아낼 수가 없다. 아름답고 착한
밤무대 가수 크리스티는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는다. 이러한 조력자로서의 여성 캐릭터의 대조적 지점에 '필리스'가 있다. 천박하고
낮은 사회 계층의 여성으로 묘사되는 이 팜므 파탈은 테일러의 불투명한 과거와 연계된 여성이다. 필리스는 테일러를 곤경으로 몰아가는
뒷골목의 인간들과 함께 한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이런 양분화된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에는 전후 미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드러난다. 여성들에게는
전쟁에서 돌아온 남성들을 환대하고 따뜻하게 도와주어야 하며, 공적인 영역(전시의 군수 공장과 같은 직장)의 자리를 기꺼이
남자들에게 인계해야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크리스티가 테일러에게 보여주는 순전한 믿음과 도움은 그러한 여성상을 대변한다. 그리고
테일러는 크리스티와 함께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고,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필리스와 같은 여성이 가진 힘은 무력화되어야만
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남자를 안전하게 사회에 복귀하도록 돕는 여성, 결코 남성에게 위협적이지 않는 여성성에 대한 재정의.
멘케비츠의 이 필름 느와르 영화는 퇴역 군인의 실존적 위기와 함께 전후 새로운 젠더 규범을 내러티브에 직조해 나간다.
2. 전후 중산층 계급의 편집증적 공포, D.O.A.(1950)
의사: 우선 경찰에 알려야겠소. 이건 살인 사건이니까요.
프랭크 비글로우: 살인 사건이라뇨?
의사: 비글로우 씨,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선생은 살해당하는 중이요.
Dr. MacDonald: Of course, I'll have to notify the police. This is a case for Homicide.
Frank Bigelow: Homicide?
Dr. MacDonald: I don't think you fully understand, Bigelow. You've been murdered.
남자는 의사로부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살해당하는 과정에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랬다. 그는 이상한 독성 물질에 중독되어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 길어야 일주일 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장길에 오른 남자는
호텔 옆방 사람들과 잠시 어울렸다. 그리고 바에서 낯선 여자와 술 한 잔을 마셨다. 도대체 왜, 누가 남자를 독살하려는 것일까?
시한부 인생이 되어버린 남자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찾아나선다.
폴란드 출신의 촬영 감독으로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던 Rudolph Maté는 헐리우드로 옮겨서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갔다. 그가 1950년에 만든 'D.O.A.'는 잘 짜여진 플롯, 거기에 더해진 긴박감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영화의 제목은
'도착 즉시 사망(Dead On Arrival)'이란 단어의 약자로, 주인공 프랭크가 맞이하게 되는 최후와 연결된다. 성실한
회계사이며 공증인으로 살아가던 남자의 일상은 평범하게 잘 짜여져 있다. 안정적인 직업,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 친구까지. 프랭크는 샌프란시스코의 출장길을 신선한 일상 탈출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악몽이 되어버린다.
갑작스럽게 맞이하게 되는 삶의 마지막 순간, 이 엄청난 재난은 누군가가 그의 술잔에 타놓은 '빛나는 독약' 때문이다. 그것은
'이리듐(Iridium)'이라는 방사성 물질이다. 'Somewhere in the Night(1946)'의 조지 테일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나치의 비밀 자금'이 그러했던 것처럼, 'D.O.A.(1950)'에는 낯설고 뜬금없는 방사성 원소가 등장한다. 영화
속 외부의 적대적 세력이 보낸 치명적 물건은 주인공을 무덤 깊숙이 끌고 간다. '나치'와 '방사능'으로 상정된 이러한 위협은
전후 미국 사회가 외부 세계에 느끼는 불안감을 의미하며, 그것이 일종의 편집증적인 공포로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미국인들의 내면에서는 사그라들지 않는 두려움이 상존하고 있었다. '냉전(Cold War)'의 시작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과 사상 검증의 바람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존재가 외부의 악의적 존재에 의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영화 속 주인공 프랭크에게 닥친 일이
그것이다. 그는 그저 열심히 살아온 선량한 시민이다. 그런 그에게 죽음이 다가온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살인범을 찾아나서는
여정, 전에는 귀찮게 느껴지던 여자 친구는 중간중간 그의 안부를 묻는다. 프랭크는 너무 고맙고 그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다시는 그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프랭크를 연기한 에드먼드 오브라이언(Edmond
O'Brien)은 당시 헐리우드의 미남 주연 배우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외모이다. 배우 생활 내내 체중 관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그는 이 영화에서 배 나온 중산층 남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 속 프랭크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 절박한 추적의
여정은 미국 중산층 계급이 느끼는 불안감과 맞닿아 있다.
프랭크가 경찰서에 도착해서 들어가는 영화 첫 부분의 인상적인 시퀀스를 비롯해, 'D.O.A.'는 너무나도 멋진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은 나중에 무려 세 번이나 리메이크 될 정도였다. '죽음의 카운트다운'이란 한글 제목으로 번역된 이
영화의 원본으로서의 독보적인 위치는 결국 시대성과 연결된다. 죽어가고 있는 주인공이 길고 어두운 경찰서 복도를 걸어들어갈 때,
그리고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형사 앞에서 자백한 후 플래시백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영화적 여정은 관객을 전후 미국 사회의
내면으로 안내한다.
3. 195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전조, No Way Out(1950)
조셉 멘케비츠 감독은 캐릭터들의 세부적 심리 묘사에 탁월하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No Way Out(1950)'은 그러한
멘케비츠의 면모를 관객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영화는 두 명의 범죄자가 교도소 병동으로 실려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조니와 레이, 이 두 명의 형제 범죄자들을 담당하는 이는 흑인 의사 루터(시드니 포이티에 분)이다. 루터는 의식이 없는 조니의
상태를 보면서 뇌종양을 의심하고 척수 천자 검사를 시행한다. 그러나 검사 도중에 조니가 사망하고, 그것을 본 레이(리처드 위드마크
분)는 루터에게 인종차별적 언사를 퍼붓으며 살인자로 몰아간다. 루터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부검을 요청하지만, 레이는
강하게 반대하고 그것을 기회로 인종 갈등을 부추기려는 공작을 은밀히 계획한다.
흑인 의사와 백인 범죄자, 루터와 레이로 대변되는 이 인종적이고 계층적인 대립의 양상은 195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매우
놀랍게 느껴진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었지만, 루터는 '피부색'에 내재된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맹목적이고 극렬한 인종차별주의적 신념을 가진 레이는 자신의 사회적 박탈감과 분노를 루터에게 투사한다. 루터의 적대자는 단지 레이
한 사람만이 아니다. 폭동으로 실려온 백인 환자를 돌보던 그에게 환자의 보호자는 '더러운 깜둥이는 손을 떼라'는 모욕적 언사와
함께 침을 뱉는다. 그가 직면한 거대하고 지독한 차별의 벽은 견고하며, 그것은 '의사'라는 직업적 명망으로도 상쇄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시드니 포이티에가 연기하는 루터의 캐릭터는 고독한 투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그에게 우군이 있기는 하다.
백인이지만 인종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동료 와튼 박사는 루터를 돕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럼에도 루터가 맞닥뜨리는 일련의 곤경은
와튼의 우호적인 태도와 도움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부검을 통해 루터의 결백이 입증되었지만, 분노에 사로잡힌 레이는 병동을 탈출해
루터를 죽이려고 한다. 리처드 위드마크가 연기한 레이의 거의 광기에 가까운 인종적 편견은 그것이 치유불가능한
'질병(disease)'임을 부각시킨다. 영화는 과연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내면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조니의 이혼한 아내 에디의 캐릭터는 그에 대한 하나의 희망적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역시 하층민 출신으로
인종적 편견을 가진 에디는 와튼의 집에서 만난 흑인 가정부 글래디스와의 대화를 통해 이해의 폭을 넓힌다. 에디의 개심(改心)은
결국 레이의 살해 위협에서 루터를 구하도록 만든다. 루터는 자신에 대한 레이의 악의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악화된 부상으로 출혈이
심해진 레이를 돌본다. 이러한 루터를 보며 에디는 레이와 같은 인간은 죽게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레이가 가진 인종차별주의,
범죄 전과, 가난, 무지, 그러한 모든 것들은 오직 죽음으로만 사라질 병증으로 여겨진다.
영화의 마지막, 에디는 레이를 지혈하는 루터를 바라보며 현관문을 열고 경찰을 기다린다. 증오는 복수가 아닌 인본주의적 신념으로
봉합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누구나 그 결말이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게 된다. 미국 사회의 오랜 불안 요소로서
인종차별 문제가 가진 위험성은 임계점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미 이전에도 여러 도시에서 인종 폭동이 발생했으며, 전쟁은 그
폭력적 사태를 잠시 동안 멈추게 했을 뿐이었다. 이제 전쟁은 끝났고,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환부를 들여다 보아야만 했다.
영화 속에서 도시의 흑백 인종 폭동이 재현되는 시퀀스는 1분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멘케비치가 압축적으로 담은 폭동
장면에는 미국 사회 내부에서 곪아터지기 시작한 인종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No Way Out', 이제 끓어오르는 분노가
빠져나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1950년대 흑인 민권 운동에 대한 명백한 예언자적 발화(發話)를 담고
있다.
*사진 출처: cinemamuseum.org.uk Somewhere in the Night(1946)
**사진 출처: cinemamuseum.org.uk D.O.A.(1950)
***사진 출처: tcm.com No Way Out(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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