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대공황 시대 미국인들의 초상, William Wellman 감독의 영화 두 편


Wild Boys of the Road(1933)
Heroes for Sale (1933)


1. 상처입고 방황하는 아이들, Wild Boys of the Road(1933)

  존 포드 감독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40)'는 가장 잘 알려진 대공황 시대의 초상일 것이다.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1939년작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대공황으로 길바닥에 나앉은 이주 노동자의 처절한 삶을 그려낸다.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그려졌음에도 영화 '분노의 포도'는 소설에 비해서 다소 온건하고 현실타협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1940년대 헐리우드 영화는 황금기의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 시기 영화 속 메시지들은 잘 절제되어 있다. 그렇게 만든 배경에는 '검열'이 있었다. 1934년, 미국 영화 산업계는 자율적인 검열 기준을 도입했다. 이른바 'Hays Code'로 불리는 영화 심의 기준이 헐리우드 영화의 내면을 지배했다. 검열은 특정 항목의 금지를 지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정부에 대한 비판을 비롯해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정치적 논제도 회피하게 만들었다. '분노의 포도'의 경우는 사회주의적 메시지를 최대한 걷어내는 데에 스튜디오의 입김이 작용했다.

  그런 면에서 1933년에 제작된 William Wellman 감독의 영화 두 편은 대공황에 대한 아주 사실적인 초상을 제공한다. 'Pre-Code Era(1930-1934)'에 제작된 'Wild Boys of the Road(1933)' 'Heroes for Sale(1933)'은 'Hays Code'가 표현의 자유를 옥죄기 이전의 다채로운 영화적 발언들을 내포한다. 두 영화가 개봉된 시기인 1933년에 미국민들은 대공황의 터널을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윌리엄 웰먼 감독은 자신과 동시대인들이 통과하는 어려운 시기를 직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강인한 성품을 가진 이 감독은 영화사의 밑바닥에서부터 구르면서 영화를 배웠다. 감독 개인의 성격적 특성과 결합한 사회적 초상으로서 그의 대공황 시대 영화들에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Wild Boys of the Road'의 도입부에서 관객은 철부지 고등학생들을 만난다. 그저 놀기 좋아하고 또래 여학생에게 관심이 많은 에디와 토미. 토미는 어려워진 가정 형편에 고등학교를 그만두려고 한다. 에디의 아버지도 대공황으로 실직자가 되었다. 두 친구는 집안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무작정 기차를 타고 길을 떠난다. 부랑자, 떠돌이를 뜻하는 'hobo'는 대공황 시기를 대표하는 단어이다. 'hobo'가 된 에디와 토미는 기차에서 같은 처지의 또래를 만난다. 샐리는 남장을 하고 기차에 탔다. 

  길바닥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목도하게 되는 현실은 참담하다. 샐리가 찾아간 시카고의 이모는 아이들을 환대하지만, 집에는 곧 경찰이 들이닥친다. 그곳은 홍등가였다. 경찰을 피해 도망치는 와중에도 빵 한 조각을 필사적으로 그러쥐는 에디의 모습에서 혹독한 가난의 그림자를 본다. 또 다시 정처없는 방랑길에 나선 아이들에게 예기치 않은 곤경이 이어진다. 토미는 기차에 치어 다리가 절단되고, 샐리는 강간을 당한다. 샐리의 이모가 '매춘부'라는 명백한 암시, 신체 절단, 비록 설정 쇼트로 제시되기는 했으나 강간에 대한 묘사는 'Hays Code'에서는 모두 금지되는 사항들이었다. 

  웰먼은 대공황 시대의 고통스런 단면을 예리하게 담아낸다. 가난과 폭력의 현실에 내던져진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도둑질에 나선다. 'Wild Boys of the Road'가 보여주는 날것 그대로의 현실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한줄기 빛을 드리운다. 판사는 재판에 넘겨진 아이들이 재활할 수 있도록 선처를 베푼다. '희망'은 영화 속 아이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필요했다. 




2. 시대의 악천후를 견디는 소시민 영웅, Heroes for Sale(1933)

  'Wild Boys of the Road'가 대공황을 통과하는 아이들의 여정기라면, 'Heroes for Sale'는 상이 군인의 눈을 통해 시대의 비참을 그려낸다. 영화는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유럽 전선의 참호에서부터 시작한다. 적군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토마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일군을 생포한다.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그는 독일군에게 붙잡힌다. 우여곡절 끝에 치료를 받고 귀환한 토마스는 동료 로저가 자신의 공적을 가로채 무공 훈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에다 치료 과정에서 독일군 의사가 쓴 모르핀 때문에 토마스는 약물 중독의 늪에 빠지는데...

  영화는 마약 중독자가 된 토마스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결국 재활원에서 회복이 되어 나왔지만, 그는 무일푼 신세이다. 토마스는 시카고에서 세탁 업체 직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지인이 발명한 세탁 기계의 특허 이익을 공장 노동자들과 공유하는 토마스. 하지만 공장의 자동화 과정에서 파업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토마스의 평온한 일상은 산산조각이 난다. 파업을 말리려던 토마스는 주동자로 체포된다. 아내 루스는 시위 현장에서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한다.

  웰먼은 노동자들의 격렬한 파업과 그것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을 실제처럼 재현한다. 이 장면에서 로레타 영이 연기한 루스가 참혹한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 장면은 꽤 충격적이다. 1920년대 미국의 노동 운동은 매우 치열했다. 사회주의와 결합한 이러한 노동 운동은 미정부에 의해 반체제적이고 전복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Red Squad'라고 불리는 진압 경찰의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는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Heroes for Sale'에서 공권력의 횡포는 평범한 한 가정을 무너뜨린다. 주모자로 몰려 5년의 형기를 살고 나온 토마스는 대공황과 마주한다. 힘겹게 재생의 길을 걸으려는 그에게 경찰은 시카고를 떠날 것을 종용한다. 당시 대도시 시카고는 노동 운동의 중심지였다.

  영화는 기차를 타고 목적지 없이 떠나는 토마스의 눈을 통해 대공황 시기 노동자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그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폭압적인 경찰들, 굶주림에 시달리며 삶의 극한으로 내몰리는 사람들. 'Heroes for Sale'은 웰먼이 만든 에칭 판화 같다. 가는 송곳으로 세밀하게 동판에 새긴 웰먼의 대공황 풍경은 매우 통렬하다. 성실하고 바르게 살고 싶은 주인공에게 세상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하지만 토마스가 지닌 따뜻한 인간성은 자신과 동시대의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이 된다. 그는 자신이 받은 엄청난 특허 수익을 빈민 구호 식당에 전액 기부한다.

  이 영화에서 묘사된 마약 중독자의 모습과 경찰의 과도한 진압 장면은 'Pre-Code Era'였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대공황을 묘사한 웰먼의 두 작품에서 그 시대와 사람들의 삶을 목격한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시련에는 거칠지만 진정성 있는 증언이 담겨있다. 분명 대공황은 시대적 재난이었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고통스러웠다. 웰먼은 당시 보통의 미국인들이 어떻게 시대의 악천후와 싸우고 있는지를 냉철한 시각으로 포착한다. 'Heroes for Sale'에서 주인공 토마스가 보여주는 인본주의적 신념은 사뭇 감동적이다. 결국 고통과 재난의 시대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온기와 이타심이다. 이례적인 전염병 시대를 지나는 오늘날의 관객에게도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시대를 뛰어넘어 전달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themoviedb.org


*** Pre-Code Era 영화
Millie(1931), What Price Hollywood?(193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pre-code-era-what-price-hollywood1932.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