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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재현된 현대 기독교 소설 장르의 변형과 이탈, Redeeming Love(2022)

 

Redeeming Love(2022), D. J. Caruso


  영화의 제목 'Redeeming Love'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구속(救贖)의 사랑'이 될 것이다. 이 '구속(redeem)'이란 개념은 비기독교도에게는 낯설게 들릴 수 있다. 그것을 풀어서 표현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는 사라졌고 신의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영화 제목부터가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렇다. 이 영화는 기독교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무려 300만 부가 팔린 소설이다. 도대체 어떤 기독교 소설이길래 그런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아주 거칠고 간명하게 영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1850년대 서부 캘리포니아, 불행한 운명의 매춘부 앤젤과 그런 앤젤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농부 마이클의 이야기. 여자 주인공 이름이 천사(Angel)이고, 남자 주인공의 성씨는 무려 호세아(Hosea, 구약 성서의 예언자)이다.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뭐 맹물같은 성경 이야기의 현대 버전이겠구먼, 할지도 모른다. 속단은 금물이다. 교회 사람들과 이 영화 같이 보러 갔다가는 영화관 나와서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헤어질 수 있다. 원작 소설의 작가 Francine Rivers는 기독교 소설에 화끈한 로맨스를 결합시킨다. 매춘부, 매음굴, 근친상간, 소아성애, 낙태, 폭력과 강간... 도대체 기독교 소설에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이 들어갈 수 있나 싶겠지만, 그것이 다양한 하위 장르로 분화된 현대 기독교 소설(Christian novel)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17세기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나 헨리크 센케비치의 '쿠오 바디스(Quo Vadis)'는 그 장르의 먼 과거에 해당한다.

  영화는 골드 러시로 흥청거리는 서부 정착촌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그 지역에서 최고로 인기가 많은 창부 앤젤은 잔혹한 포주 밑에서 희망없는 삶을 이어간다. 그런 엔젤에게 순박한 청년 농부 마이클이 나타난다. 이 남자는 앤젤을 사랑한다면서 결혼해달라고 말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앤젤은 마이클을 밀어내지만, 남자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조금씩 마이클에게 마음을 열게된 앤젤은 마이클의 농장에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이클의 매형 폴이 찾아오고 폴은 앤젤의 과거를 들먹이며 마이클과 헤어질 것을 종용한다. 앤젤은 고통스런 과거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원작자 프랜신 리버스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서부'를 온갖 죄와 악덕의 구렁텅이로 묘사한다. 금을 찾기 위해 몰려든 남자들은 앤젤과의 동침을 꿈꾸며 번호표 당첨의 기회를 열망한다. 그들이 내는 화대(花代)는 고된 노동의 산물인 '사금'이다. 욕정을 만족시키는 댓가로 금가루를 지불하는 그곳에 처절하게 고통받는 한 여성이 있다. 이 여자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비극이었다. 어머니는 유부남과의 관계에서 앤젤을 낳았다. 버림받은 앤젤의 엄마는 매춘부로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 그리고 어린 앤젤은 사창가에 팔렸다. 주인공 앤젤이 살아온 지독한 수난극 같은 인생에 구원자 마이클이 홀연히 등장한다. 마이클은 더러운 서부의 지옥도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고 순결한 인물이다. 마이클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앤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마이클의 앤젤에 대한 감정을 진정한 사랑으로 보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고통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신앙적 사명감의 측면이 더 크다.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마이클은 앤젤에 대한 사랑을 신의 계시와 섭리로 생각한다. 그는 일방적으로 앤젤에게 다가서며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삶의 큰 틀에 앤젤을 포섭하려고 한다.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을 언급하는 이 남자의 집념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을 준다. 영화에서 앤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수치심으로 온전히 한 인간, 여성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앤젤이 강물에서 피가 나도록 마구 피부를 문지르며 씻는 장면이 그 단적인 예이다. 그런 앤젤과 정반대의 대비되는 지점에 마이클이 서있다. 완벽하고 순결한 배우자, 구원자인 마이클은 앤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해심을 보여준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람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작가 Francine Rivers의 개인적 삶에 들어 있다. 리버스는 로맨스 소설로 자신의 글쓰기 경력을 시작했다. 1947년생인 이 작가는 마흔이 될 무렵, 인생과 경력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만난다. 독실한 기독교도로 거듭난 것이다. 더이상 그저 그런 싸구려 로맨스 소설 따위는 쓸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리와 신의 섭리를 전파하는 도구로써 글을 써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런 결심을 한 후에 쓴 작품이 바로 'Redeeming Love(1991)'였다. 이 소설은 구약 성서의 '호세아서(Book of Hosea)'에서 주요한 플롯을 따왔다. 14장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예언서는 예언자 호세아가 신의 명령에 따라 창녀 고멜과 결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창부 고멜은 이교도의 신 '바알'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리버스의 소설 '구속의 사랑'은 순박한 농부 마이클 호세아와 창녀 앤젤의 관계를 통해 무조건적인 신의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선정적이고 적나라한 표현과 설정도 성서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미명하에 쉽게 용인된다. 성서와 로맨스의 이 기묘한 결합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상업주의적인 면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원죄를 지닌 인간의 비참함과 추악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폭력과 성에 대한 묘사의 수위가 높아진다.

  "새라, 그게 내 진짜 이름이에요."
   (My real name is Sarah.)

  영화 내내 '앤젤(Angel)'로 불리던 여자 주인공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이 지겨운 영화가 끝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러닝타임 2시간 14분은 정말이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었다. 앤젤의 진짜 이름 사라는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아브라함의 아내이며 이삭의 어머니. 그 작은 뿌리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무수한 별처럼 뻗어나갔다. 불임이었던 앤젤은 아이를 갖게 되고 마이클과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영화 'Redeeming Love'는 그렇게 끝난다. 현대 기독교 소설 장르의 기묘한 변형과 일탈적 면모가 어떻게 영화로 구현되었는지 궁금한 이라면 한번 볼 법도 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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