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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 사이, 그 창의적 간극(間隙): The Mist(2007)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안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The mist was coming)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The Birds, 1963)'는 이전까지 사람에게 무해한 존재로 인식되던 '새'를 공포 영화의 주인공으로 둔갑시킨다. Frank Darabont의 2007년작 'The Mist'에서는 안개가 죽음을 몰고 온다. 정확히는 안개와 함께 온 괴생명체들이 한 마을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영화의 원작은 Stephen King이 1980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원작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정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소설과 영화는 어떻게 다를까?

  메인주의 작은 마을, 화가 데이비드에게는 아내와 5살 아들 빌리가 있다. 심한 뇌우로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불안해진 마을 사람들은 식료품을 쟁여놓기 위해 동네 슈퍼마켓에 모여든다. 데이비드도 아들과 함께 마트에 들른다. 그런데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들어온다. 남자는 위험하다며 마트를 나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밖은 순식간에 밀려든 안개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소 괴팍하고 신경질적인 중년 부인 카모디는 이건 죽음의 징조라며 혼자 중얼거린다.

  영화 '미스트'에서 공포의 대상은 안개 그 자체가 아니라 안개 속의 괴생명체들이다. 거대한 촉수와 빨판이 달린 괴물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죽인다. 마트 안의 사람들은 이 괴물들과 대적하는 동안 두 부류로 나뉜다. 데이비드를 비롯해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은 총과 빗자루, 화염방사기로 괴물과 사투를 벌인다. 반면 카모디 부인이 주축이 된 일군의 무리는 일그러진 종교적 신념에 휩쓸린다. 영화는 카모디 부인을 비뚤어진 광신도로 묘사한다. 하지만 원작 소설 속의 카모디는 기이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면서 일종의 주술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미스트'는 어떻게 공포가 사람의 내면을 망가뜨려가는지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묘사한다. 적대적인 타자는 괴생명체가 있는 마트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존재로서 괴물이 사람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한다면, 카모디 부인은 자신의 잘못된 광신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난데없이 등장한 안개와 괴물들은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포에 휩쓸리고 인내심은 곧 바닥이 난다. 그 틈을 비집고 맹목적 신념이 들어선다.

  공포는 광기와 일탈 행위로 이어진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설 속의 데이비드는 극한의 상황에서 눈이 맞은 아만다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영화의 결말부에서 카모디 부인이 아만다를 향해 '창녀(whore)'라는 모욕적 표현을 쓰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데이비드가 성적 일탈을 보여준다면, 카모디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개 속 괴물에게 인신 공양을 하도록 부추긴다. 마트 안의 사람들 누구도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안개가 몰고온 재난은 신체적 위협과 상해를 가할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이성과 윤리를 마비시킨다.

  원작자 스티븐 킹은 카모디 부인의 죽음과 함께 데이비드 일행의 암울한 탈출 여정을 암시하는 것에서 소설을 끝낸다. 그와는 달리 프랭크 다라본트는 이 공포 수난극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차를 몰고 마을을 떠나려는 데이비드는 엄청난 크기의 괴물을 목격하고 절망한다. 연료가 떨어진 차가 멈춘다.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아들 빌리를 비롯해 일행을 죽인다. 그 순간, 안개가 걷히면서 마을에 진입하는 군부대가 보인다.

  아마도 그러한 결말은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논란이 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광기와 합리적 선택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과연 무엇일까? 기다림? 데이비드가 좀 더 기다렸다면 그는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가정일 뿐이다. 소설은 데이비드와 일행 앞에 놓인 미래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스티븐 킹은 '희망(hope)'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소설을 끝맺는다.

  소설 '미스트'는 초자연적 타자를 내세워 인간 내면의 연약함을 역설한다. 영화 속 끔찍한 괴물은 사람의 육신을 찢고 피를 튀기며 잡아먹는다. 마찬가지로 공포는 이성의 눈을 가리며 결국에는 통째로 삼켜버린다. 영화의 참혹한 결말은 호수에서 데이비드가 처음으로 안개를 목격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스티븐 킹이 멈춰 버린 곳에서 자신만의 구부러진 길을 만든다. 그것이야말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창의적이고 놀라운 틈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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