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필름 느와르에 나타난 이국성과 식민지주의, 편지(The Letter, 1940)

 *이 글에는 영화 '편지(The Letter, 1940)'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26년, 영국의 작가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은 말레이시아 여행을 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들을 모아 출간한다. '편지(The Letter)'는 바로 그 단편집에 실려 있었던 작품이다. 그는 싱가포르의 한 변호사로부터 1911년에 있었던 악명높은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주석 광산 책임자의 아내가 관리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었다. 여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곧 사면되었다. 서머싯 몸은 그 실화를 그대로 따왔다. 그가 한 것은 거기에 '편지'라는 소재를 추가한 것이다. 그 단편 소설은 인기가 있었고, 작가는 그것을 희곡으로 다시 썼다. 1929년에 헐리우드에서 처음으로 영화화되었고,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1940년에 베티 데이비스를 주연으로 같은 제목의 영화를 찍었다.

  영화는 충격적인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열대 나무 숲 사이에 자리한 저택에서 별안간 총소리가 이어진다. 총에 맞은 남자가 계단을 굴러 넘어지는데, 뒤따라 나온 여자는 남자가 쓰러진 뒤에도 총격을 가한다. 여자가 쏜 총알은 한 발이 아닌, 모두 여섯 발이었다. 침착하고 담담하게 집으로 들어간 그 여자, 레슬리는 집사에게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라고 말한다. 레슬리는 체포되고, 남편 로버트는 부부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조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레슬리는 자신을 범하려던 해먼드에게 맞서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진술한다. 그 주장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조이스에게 중국인 비서 옹은 레슬리에게 불리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고 귀뜸한다. 죽은 해먼드의 부인이 레슬리가 해먼드에게 와달라고 쓴 편지를 갖고 있고, 그것을 건네주는 댓가는 만 달러라는 것. 조이스는 로버트를 설득해 편지를 획득할 돈을 타내고, 조이스와 동행한 레슬리는 해먼드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아낸다. 과연 그 편지의 내용은 무엇이며, 레슬리는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풀려날 수 있을까?

  서머싯 몸은 여행하기를 무척 좋아했던 작가였다. 그는 여행지에서 들은 이야기와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글을 썼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The Painted Veil, 2006)'의 원작 소설도 그런 여행의 산물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체류를 통해 32편의 단편 소설을 썼고, 그것을 따로 묶어서 단편집으로 펴냈다. 그만큼 말레이는 그에게 인상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그가 소설에 묘사한 말레이의 모습은 현지인들의 기대에 어긋났다. 구습과 전근대성의 상징으로서의 말레이에 대한 묘사는 현지인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영화 '편지'에서도 그런 면모는 선명하게 부각된다.

  레슬리의 현지인 집사는 살인이 있던 날 밤 사라진다. 사라진 그는 해먼드 부인의 수하가 되어 복수를 돕는다. 부인의 외모는 현지 말레이인들과 좀 다른데, 영화 속에서 중국인과 유럽인의 혼혈로 나온다. 게일 손더버그가 연기한 해먼드 부인의 외양은 중국풍의 옷에 치렁치렁한 장신구들, 냉혹한 표정으로 무장하고 있다. 레슬리는 그런 해먼드 부인의 모습을 끔찍하다고 묘사한다. 관객들에게도 해먼드 부인은 기이한 이국성과 비호감의 이미지로 비춰진다. 현지인에 대한 그런 뒤틀린 이미지는 처음으로 편지의 존재를 드러내는 조이스의 비서 옹에게서 더욱 강화된다. 영어를 구사하고, 멀끔한 양장을 입은 옹은 주도면밀하게 편지 거래를 성사시킨다. 편지의 사본으로 조이스에게 레슬리에 대한 의혹과 불안을 심어주고, 결국 레슬리 남편 로버트의 재산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1만 달러라는 큰 돈으로 편지를 사게 만든다. 항상 웃는 표정의, 성실한 비서는 교활하고 파렴치한 거간꾼의 면모를 보여준다.

  '편지'에서 관객들이 만나는 것은 영화 곳곳을 채우고 있는 이국성과 식민지성이다. 레슬리의 재판 장면에서 재판부와 배심원들은 모두 백인들이며, 그들은 결국 레슬리의 정당방위를 영웅적인 행위로 보고 무죄 판결을 내린다. 지배계층으로서의 피식민지인들의 비윤리성은 불륜과 살인을 저지른 레슬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이스는 변호사로서의 직업 윤리를 저버리고 증인 매수에 나선다. 그가 레슬리의 남편 로버트를 설득해 편지를 입수하는 데에 쓴 돈 1만 달러는 로버트의 고무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나온 돈이다. 식민지의 자원에서 수탈한 이윤은 그들의 도덕적 타락과 범죄를 은폐하는 데에 사용된다.

  원작 소설에서 해먼드의 여자는 'wife'가 아닌 'mistress(情婦)'로 나온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유라시아 혼혈이 아닌 '중국인' 여성, 그것도 연상의 나이든 여자로 지칭된다. 결국 해먼드 부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영화 속 레슬리와는 달리, 소설에서는 레슬리가 무죄방면되어 자신의 화려한 생일파티를 여는 장면에서 끝난다. 왜 원작과 다른 그런 각색이 이루어졌을까? 그것은 당시 미국 영화의 검열 제도(The Hays Cord) 때문이었다. 1934년부터 1968년까지 적용된 스튜디오의 자체 검열 제도는 '편지'에도 적용되었다. 특정 국가나 인종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것은 핵심 사항에 속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 여성'은 '유라시아 여성'으로 바뀌었다. 또한 내연녀의 등장도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이 등장했다. 레슬리의 죽음 또한 피할 수 없었다. 불륜에 살인까지 저지른 인물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결말이었다.

  서머싯 몸은 뛰어난 작가였으나, 제국주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그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쓴 '편지'는 기묘한 이국성과 함께 식민지주의가 날것으로 숨쉬고 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그런 원작을 절묘하게 가공한 필름 느와르를 보여준다. 베티 데이비스는 고혹적인 외모에 사악한 열정을 지닌 레슬리를 잘 소화해냈다. 엄격한 검열이 없었다고 해도 '편지'의 결말은 충분히 비극적이다. 레슬리는 자신이 죽인 남자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남편에게 고백한다. 그런 여자를 사랑해서 버리지 못하는 남편에게도 고통의 시간은 이어질 것이다. 실제의 치정 사건은 그렇게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심리물로 재탄생했다.    


*사진 출처: commons.wikimedia.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