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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소동극에 숨겨진 소련의 사회 문제, 사랑과 비둘기(Любовь и голуби, Love and Pigeons, 1984)

 

  영화 '사랑과 비둘기(Love and Pigeons, 1984)'는 감독 블라디미르 멘쇼프(Vladimir Menshov)가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1980)'로 대중적인 성공을 얻은 뒤에 찍은 작품이다. 블라디미르 구르킨의 희곡을 각색한 이 영화 또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개봉 당시 4450만명의 관객이 영화를 보았으며, 이 영화를 아직도 기억하고 다시 보는 러시아 관객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길래 그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을까? 의외로 영화의 줄거리는 지극히 평범하다.

  강이 흐르는 시골 마을에서 목재 노동자로 일하는 바실리는 비둘기 사육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아내 몰래 생활비를 빼내어 비둘기를 사들이는 그에게 아내 나쟈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차분한 성격의 큰딸 류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은 아들 레오니드, 아버지를 이해하는 속 깊은 막내 올리야는 부부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웃에는 알콜 의존증이 심한 삼촌 미챠와 그런 남편 때문에 속끓이는 숙모 슈라가 산다. 별 다를 게 없는 소소한 그들의 일상에 어느 날 일이 생긴다. 바실리는 일하다 얻는 부상 때문에 휴양지에서 쉴 수 있는 휴가를 받는데, 그곳에서 만난 라이사와 눈이 맞는다. 비둘기와 가족 밖에 모르던 바실리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라이사의 집에 머무른다. 바실리의 아내 나쟈는 상심해서 드러눕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행동에 상처받는다. 부유한 라이사의 생활 방식에 맞추지 못하던 바실리는 가족이 그리워진다. 다시 집에 돌아온 바실리. 과연 아내와 자식들은 그를 받아줄까?

  바람난 남편의 귀환을 둘러싼 가족 소동극은 겉보기엔 아주 흔하고 진부한 이야기 같다.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나쟈는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비탄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걸 연기하는 배우 니나 도로시나(Nina Doroshina)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나쟈의 상황이 너무나 심각한데, 보고 있는 관객은 이 가족의 비극이 전혀 비극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멘쇼프 감독은 자신만의 상황에 몰입된 인물이 보여주는 희극성을 뽑아낼 줄 안다. 나쟈와 라이사가 머리끄댕이를 잡고 벌이는 육탄전도 우스꽝스럽게 연출된다. 그 웃음은 집에 돌아온 바실리와 아들의 대립에서 절정을 이룬다. 레오니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며 도끼를 들고 설친다. 이에 바실리는 아들에게 목을 들이대며, '그래, 아비의 목을 쳐봐라'하면서 응수한다. 이 기막힌 소동극은 뭔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지속적인 웃음을 유발한다.

  그저 그런 코미디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이 영화는 원작자 구르킨이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들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써졌다.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에 더하여 바실리의 삼촌 미챠가 보여주는 알콜 의존증의 모습은 당시 소련 사회가 가진 음주 문제의 심각성을 암시한다. 미챠는 늘 보드카를 숨기고, 아내 슈라와 바실리의 가족들은 그것을 막느라 애를 쓴다. 여러 번 반복되는 보드카 숨바꼭질은 관객들에게는 웃음거리일지 몰라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브레즈네프 시기의 경제 침체기를 거치면서 소련의 보드카 소비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구 소련의 1970년대 영화들에서도 이런 상황이 에피소드식으로 들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게오르기 다넬리야 감독의 '가을 마라톤(Autumn Marathon, 1979)'에서 보드카에 취한 스웨덴 교환교수 빌이 알콜 치료 센터에 하룻밤 구금되는 상황이 나온다. 그 센터는 마치 거대한 병동처럼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보드카는 소련 사람들에게 일상의 위안으로 깊숙이 자리잡았다. 알콜 중독이 노동 생산력의 손실과 조기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국가적 위험 요소임을 공산당 정부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류 판매가 국가 재정에 기여하는 점과 정권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출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소련 당국은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85년, 고르바초프의 집권과 함께 상황이 급변한다. 알콜 중독을 국가적 질병으로 규정한 고르바초프는 강력한 알콜 규제 캠페인을 벌인다. 이 영화가 제작될 무렵은 이제 막 그 정책이 입안되려는 때였다. 검열 당국은 영화 속 음주 장면들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주인공 바실리를 비롯해 미챠가 지나치게 많이, 자주 보드카를 마시는 장면을 삭제하도록 했다. 멘쇼프 감독은 영화의 이야기 진행상 그 장면들을 뺄 수 없다고 버텼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미챠가 보드카를 마시려는 시도는 가급적 실패하는 것으로, 또한 보드카 대신에 맥주로 대체된 장면이 들어갔다. 영화 '사랑과 비둘기'는 술과 관련된 부분 뿐만이 아니라, 불륜을 소재로 한다는 점도 검열 당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소재들이 국가가 강제한 사상적, 윤리적 가이드라인의 영향을 받았다. 소박한 시골 가족의 일상을 그린 코미디의 이면에는 그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영화의 마지막, 등장 인물들은 모두 바실리가 키우는 흰 비둘기들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사랑과 화합을 이야기하며 끝나는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안정적 체제에 대한 희구, 자기 위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와 대립하던 아들은 군에 입대한다. 영화는 변경 배치를 자원한 레오니드를 내세워 국방의 의무를 역설한다. 소련 체제는 아직까지는 건재했다. 그러나 이미 체제의 밑바닥에서는 심각한 균열이 진행되고 있었다. 멀지 않은 시일에 소련은 곧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될 예정이었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희망의 미소는 잠정적이며 일시적인 것이었다. 영화에 잠재된 소련 사회의 알콜 중독 문제와 함께, '사랑과 비둘기'는 당시의 소련을 이해할 수 있는 영화 사회학적 텍스트로 손색이 없다.


*사진 출처: primemovies.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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