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라두 주드의 통찰력 있는 역사극, Aferim!(Bravo!, 2015)

 

  영화는 숲 속을 헤치며 말을 타고 가는 두 명의 여행자를 비춰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때는 1835년, 루마니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왈라키아 왕조가 시대적 배경이다. 대영주(Boyar로 지칭함)의 법 집행관인 코스탄딘은 영주의 명을 받고 도망 노예 집시 카르핀을 찾는 중이다. 그의 동행은 아들 이오니타. 앳된 티가 역력한 십대의 아들은 군복과 총검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하는 행동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도망자를 쫓는 여정은 경험많고 노련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일러주는 직업과 세상살이에 대한 교육의 시간이 된다. 가는 길에 만나는 사제, 집시, 농민, 관료들과의 만남은 당시의 루마니아 사회를 알 수 있는 역사화처럼 묘사된다. 루마니아의 감독 라두 주드(Radu Jude)의 2015년작 'Aferim!'은 관객들을 19세기의 루마니아로 안내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은 '집시(Roma)'와 관련되어 있다. 코스탄딘은 가는 도중에 만나는 집시 무리를 매우 가혹하게 다룬다. 그들은 말 그대로 짐승과 같은, 어쩌면 짐승 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진다. 코스탄딘은 채찍을 휘두르며 집시들을 제압하며, 그들이 채굴한 사금도 갈취한다. '사금 채취'는 집시들이 전통적으로 종사한 일이었다. 루마니아의 귀족 계급과 수도원은 그런 집시들을 노예로 두면서 그들의 노동력과 생산물을 수탈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시란 벌레처럼 더럽고 하찮은 존재라고 가르친다. 그가 집시처럼 경멸하고 역겨워하는 또 다른 대상은 사제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길에서 만난 사제는 '유대인'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배척의 감정을 토로한다. 코스탄딘과 사제가 공유하는 그런 차별적 인식은 유럽 사회가 가진 반유태주의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부자(父子)가 도망 노예를 추적하는 여정의 대부분은 숲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19세기 루마니아인의 정신 세계를 반영한다. 코스탄딘은 길을 묻는 투르크의 관료에게 일부러 틀린 길을 알려준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왈라키아 공국의 사람으로서 그가 투르크인에게 보여주는 감정은 근원적인 증오이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계급체계는 인정한다. 길 비키라고 행패부리는 귀족과 수행원들에게는 군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이웃 영주의 관료가 영토의 무단 침입을 문제 삼자 돈으로 구슬린다. 지배 계급의 충실한 종복으로서 그는 자신이 사는 세계의 질서에 철저히 순응한다. 코스탄딘이 바라보는 세상은 흑백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아는 지식 그대로 아들에게 가르친다. 존경해야할 사람과 증오해 마땅한 대상이 있고, 복종해야할 지배 계급과 마구 짓밟아도 되는 집시 노예들이 있다. 어리버리해 보이는 그의 아들은 스펀지처럼 아버지의 가르침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세대 간에 전수되는 경험과 지식은 온갖 편견과 증오, 비굴함과 우월감이 혼재되어 있다.

  자, 다시 코스탄딘의 여정으로 돌아간다. 그는 도망간 집시 노예 카르핀을 아들과 합심해 붙잡는다. 카르핀을 숨겨준 농민은 착해서 그를 숨겨준 것이 아니다. 마치 임자없는 물건 줍듯이 농민은 아주 어린 집시와 카르핀을 노예로 삼았다. 오랫동안 노예제를 유지해온 루마니아에서 집시들은 주요한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카르핀을 잡으면서 어린 집시까지 빼앗은 코스탄딘은 여비를 위해 시골 장터에서 집시 아이를 팔아버린다. 아이를 사가려는 귀족은 가축 품평하듯 아이의 치아를 살펴본다. 라두 주드가 보여주는 19세기 초반의 루마니아는 그런 곳이다. 차꼬를 채워서 데리고 가는 노예 카르핀은 말 그대로 짐짝처럼 부려지며, 부자가 먹다남긴 음식 찌꺼기로 연명한다.

  흑백의 화면 속에 펼쳐지는 자연의 고요함과 광활함은 놀랍게도 인간 세계의 잔혹함과 기묘한 대비를 이룬다. 이 세계에 연민과 동정, 합리적 이성이란 것이 존재할까? 카르핀은 돌아오는 여정 내내 무죄를 호소한다. 잘못은 유혹한 영주의 부인에게 있으며, 자신을 영주에게 넘겨주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죄없는 노예를 풀어주자는 아들의 말을 코스탄딘은 묵살한다. 그는 영주 부인의 과오를 곧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영주에게 카르핀을 넘긴다. 그는 투철한 직업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아들에게 가르친다. 그 여정의 끝에서 그가 아들과 함께 목격하게 되는 것은 분노한 영주의 무지막지한 처벌이다.

  "세상이란 데가 원래 그런 거야."

  처벌 장면에 충격을 받은 아들에게 코스탄딘은 그렇게 위로한다. 권력을 가진 자가 미쳐 날뛰는 것을 바라보야야 하는 세계, 법과 도덕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무지막지한 힘의 세계, 그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생존이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 굴종하고, 약한 이들은 짓밟는다. 영화의 마지막, 짧게 나오는 자막은 영화가 실제 역사적 기록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다. 과연 오늘날 현대의 관객이 사는 세상은 영화 속 코스탄딘이 살았던 세계에서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두 주드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루는 근원적 지배 구조와 그것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세대의 이 루마니아 감독은 생생하고 통렬한 역사극을 통해 현재를 돌아보게 만든다. 


*사진 출처: romaniajournal.ro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