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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필름 느와르의 독특한 변용, 일요일에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It Always Rains on Sunday, 1947)

  

  필름 느와르(Film noir)를 장르로 볼 것이냐, 스타일의 한 유형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아직도 영화학자들 사이의 의견은 엇갈린다. 사실 필름 느와르의 본질적 요소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이냐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대체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있다면, 범죄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탐구, 비정형적인 내러티브와 비극적 결말, 촬영 기법에서 두드러지는 명암 대비,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들(팜므 파탈을 포함해)이 등장하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일반적 범주에서 하드보일드(hard-boiled) 추리 소설이 초창기 필름 느와르의 원천이 되었던 것도 그런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1947년에 영국의 일링 스튜디오(Ealing Studios)에서 제작한 로버트 해머(Robert Hamer) 감독의 '일요일에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 It Always Rains on Sunday)'도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필름 느와르에 속한다. 영화는 런던 동부의 Bethnal Green을 배경으로 범죄자의 탈주를 둘러싼 일련의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 내내 비가 내리는 풍경이지만, 영화는 결코 스산하거나 어둡지 않다. 가족 멜로 드라마의 외양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유지되는 긴장과 스릴은 소시민의 평범한 일상과 결합해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로즈는 두 명의 십대 딸을 둔 중년 남자와 결혼해서 자신의 아들을 두었다. 유순하고 착한 둘째 의붓딸 도리스와는 달리 첫째 딸 바이는 사사건건 로즈와 부딪힌다. 자신 보다 15살 연상인 남편 에드워드는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팍팍한 하층민의 삶은 로즈를 지치게 만든다. 비가 내리는 일요일 아침, 남편이 읽고 있던 신문에는 탈옥수 토미 스완의 기사가 실린다. 10년 전, 토미와 로즈는 연인 사이였다. 경찰들은 토미를 잡기 위해 탐문 수사를 진행하고, 그 와중에 토미는 로즈의 집에 숨어든다. 로즈는 가족 모두가 외출한 사이 부부의 침실에서 토미를 쉬게 해주지만, 수시로 드나드는 가족들과 비좁은 집에서의 숨바꼭질은 위태롭기만 하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일상성에 대한 적확한 묘사와 다양한 소시민들의 삶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주부로서 로즈는 식사와 빨래 같은 가사일을 해내느라 주방에서 내내 동동거린다. 로즈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지만,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로즈의 젊은 시절은 분방함으로 채색되어 있다. 남자 친구였던 토미의 예기치 못한 방문은 로즈의 마음을 뒤흔든다. 부부 침실에서 토미가 자고 있는 동안, 1층의 거실과 부엌에는 계속해서 가족들이 드나든다. 첫째 딸 바이는 거울을 찾는다며 그 방에 들어가려다, 로즈에 의해 제지당하고 둘은 거친 욕설과 몸싸움을 벌이기까지 한다. 이 비좁은 2층 주택에서 벌어지는 숨막히는 소동극이 주된 플롯이라면, 하위 플롯으로는 동네 주민들의 여러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동네 사랑방 같은 작은 술집에서 뒷골목 갱들은 롤러 스케이트를 비싸게 팔아먹을 궁리를 한다. 바이는 드나들던 댄스홀의 유부남 연주자와 바람이 났다. 도리스는 또래의 착한 동네 청년과 사귀고 있지만, 건달 우두머리는 끈질기게 관심을 보인다. 로즈의 아들은 친구와 시끄럽게 하모니카를 불어대며 비오는 거리를 제멋대로 돌아다닌다. 감독 로버트 해머는 마치 Bethnal Green의 일상을 그린듯한 다큐멘터리처럼 고정된 카메라로 우유 배달부와 신문팔이 소년이 다니는 거리,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의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준다.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하는 일요일의 빗줄기는 하층 주거지로 숨어든 탈옥수의 존재와 더불어 잠재된 불안처럼 모든 것에 스며든다. 

  '일요일에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에는 전후 영국이 처한 사회 현실이 드러난다. 전쟁은 끝났고, 사람들은 일상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하층 소시민의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불안와 동요의 징후는 로즈의 집 2층 침실에서 발각의 위험 속에 잠자고 있는 토미처럼 존재했다. 로즈가 꾸려나가는 가정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나이든 남편에 대한 애정은 희박하고, 전실 자식들은 혹처럼 느껴질 뿐이다. 토미의 유혹에 로즈는 무너지지만, 그 둘은 미래를 꿈꿀 수 없다. 결국 토미의 탈주극은 실패로 끝나고, 로즈도 가정을 버리지 못한다. 비가 내리는 이 칙칙한 거리에서 탈출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영화가 암시하는 전후의 영국 사회는 폐쇄적 침잠에 가깝다.

  이 영화가 밋밋하다고 느끼는 관객들에게 마지막 10분은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결코 총을 쏘지 않는 영국 경찰과 토미가 벌이는 기차 역에서의 역동적인 야간 추격장면은 이 영화가 가진 필름 느와르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로버트 해머는 사실주의와 결합한 필름 느와르의 새로운 변용을 보여준다. '사랑스럽다'라는 표현이 어색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나는 이 영화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개봉 당시,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일요일에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에 드리운 독특한 아우라를 걷어낼 방법은 없어 보인다. 좋은 영화는 그렇게 시간의 힘을 견뎌낸다.   


*사진 출처: bfi.or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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