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어버린 커피와 김빠진 맥주. 흘러간 옛 영화를 보는 것이 가끔은 풍미를 잃은 커피와 맥주를 들이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카렐 라이츠(Karel Reisz) 감독의 데뷔작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1960)'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 그러했다. 이 영화에서 카렐 라이츠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영국의 새로운
영화 사조 '프리 시네마(Free Cinema)'의 주역으로서 현실에 천착하는 사실주의와 영화의 결합을 보여준다. 이른바
'싱크대 사실주의(Kitchen Sink Realism, 표현주의 화가 John Bratby가 주방 싱크대, 쓰레기통과 같은
일상적 소재로 그린 그림에서 유래)'의 영향은 당시 영국의 문화 영역 전반을 아우른다. 그것은 하층 노동자 계급의 실제적 삶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성과 낙태, 범죄에 대한 소재까지 다루었다.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은 어떤 면에서 그 사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전거 공장에서 선반공(旋盤工)으로 일하는 청년 아서는 고된 노동을 주말의 여흥과 음주로
달랜다. 그는 직장 동료의 아내 브렌다와 불장난 같은 밀회를 이어가고 있다. 우연히 알게 된 도린과 진지한 연애를 시작하지만,
아서는 결혼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다. 그 즈음, 브렌다는 임신 사실을 알리고 아서는 낙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서의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브렌다의 낙태는 여의칠 않고, 아서와의 관계를 알게 된 남편의 군인 동생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고된 육체 노동으로 부모와 자신의 생계를 겨우 해결하는 삶, 결혼은 멀고 답답하게만 느껴지고 그렇다고 별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서의 청춘에 볕들 날은 있는 걸까?
혈기왕성한 이십대의 청년 아서에게 현실의 모든 것은
불만족스럽다. 그가 하는 공장일은 위험하고 고된 것이다. 기계에 손이 끼여서 절단되는 산재 사고는 일상적인 일로 여겨지고,
쥐꼬리만큼 받는 주급 14파운드에서 3파운드는 세금으로 뜯긴다. 부모와 함께 사는 그의 수입 대부분은 먹고 사는 데에 쓰인다.
남는 돈 몇 푼은 주말의 폭음으로 낭비된다. 한마디로 아서에게는 삶의 낙이 없다. 그런데 나이든 윗 세대들, 그 꼰대들은 '옛날이
좋았어'라든지, '인생을 즐기고, 착실하게 살라구'라는 소리를 걸핏하면 해댄다. 아서는 그런 말이 제일 듣기 싫고 역겹다.
꼰대들의 좋았던 시절이 어땠는지는 모르겠고, 지금의 현실은 수채구멍처럼 역겹고 냄새날 뿐이다. 전쟁과 혁명이 젊은 세대들에게
변화의 역동성을 가져다 주었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아서는 현실에 순응해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아서는 자신의 화를 폭음과 욕설, 장난으로 해소한다. 아서가 사는 하층 주거 단지는 벌집처럼 이어져 있는데, 이웃의 수다쟁이 벌
부인과 아서는 사이가 좋지 않다. 유부녀를 만나고 다닌다는 험담을 떠들고 다니는 벌 부인에게 공기총을 쏘아 골탕 먹이고
조롱한다. 공장에서는 쥐의 사체를 부품 상자에 두어 늙은 여직원을 기겁하게 만드는 장난을 친다. 몸뚱이는 어른인데, 하는 짓은
애들 같다. 아서의 이런 미성숙하고 제멋대로인 행동은 그가 자신의 진지한 인생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무지한
청춘은 낙태 문제를 상담하러 고모에게 달려간다. 그는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서는 어른이 된다는 건 기성 세대와 지배
계층이 깔아놓은 판에서 비굴하게 사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촌과의 대화에서 아서는 체제에 고분고분하게 길들여진 부모처럼 살기는
싫다고 말한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도린과의 결혼을 주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So what?"
영화가 보여주는 아서의 답답함과 울분은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야?'로 끝나고 만다. 그 시절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소설, 연극,
영화, TV는 노동자 계급의 일상과 현실의 부조리를 가지고 참 많이도 울궈먹었다. 아마도 특정 '사조(思潮)'의 흥망성쇠는 그
우려내 먹는 기간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토니 리차드슨(Tony Richardson)이 그 무렵에 만든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9)', '꿀맛(1961)', 린제이 앤더슨의 'This Sporting LIfe(1963)' 같은 영화들.
결국 그런 영화들이 보여준 것은 영국이란 사회의 견고한 계급적 폐쇄성이었다. 표현과 비판으로서의 예술은 그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에
별 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하층 계급의 문화적 소비재가 되어, 불만의 적당한 분출구를 만들어 줌으로써 안정적 체제의
윤활유 같은 역할을 했을 뿐이다.
현실의 'Angry young man'도 먹고 사는 것에 매여 살다 보면
'착실하고 온순한' 기성 세대가 되어 버린다. 아서가 짜증스럽고 역겹게 생각하는 기성 세대를 '욕받이' 꼰대로 취급하는 것은 매우
쉬운 방법이다. 불만족스럽고 힘든 현실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아서는 그런 변화를 위한 그 무엇도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아서는 도린과 함께 교외의 언덕에서 주택 단지를 바라보며 자신들이 살 집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이제
진짜 '어른'이 되려는 걸까? 영화 속에서 술 취해 거리의 가게 유리창에다 돌을 던진 늙은이처럼 아서는 멀리 있는 그 집들을 향해
심통이 나서 돌을 던진다. 잔뜩 화가 난, 답답한 청춘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난다. 그의 짜증과 분노는 아무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짧게 쉬고 즐길 수 있는 주말이 지나가면 다시 일해야 하는 지겨운 월요일이 돌아온다. 영화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의
정서는 일요일 저녁에 직장인들이 느끼는 긴장과 우울감과 맞닿아 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사진 출처: eastman.org 아서 역의 배우 알버트 피니(Albert Fi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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