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광란의 오후(One False Move)'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약간 들떠있다. 아칸소 주 스타 시티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경찰 데일 딕슨은 LA 경찰국으로부터 마약상들을 잔인하게 죽인
3인조 강도가 자신의 마을에 들를 수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매일의 일상에서 별 일이라고 해봐야 술 취한 남자가 집 문짝을
도끼로 부수는 걸 말리는 정도인 딕슨에게 그것은 진짜 경찰 업무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LA에서 파견된 경찰 콜과
맥필리와 함께 딕슨은 범죄자들을 기다린다. 이 마을 출신의 환타지아와 애인 레이, 뛰어난 지능을 가진 냉혈한 플루토는
마약상들에게서 탈취한 마약을 거래하기 위해 휴스턴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들이 기대한 거래는 결렬되고, 환타지아는 고향집에 있는
어린 아들을 보기 위해 이탈한다. 레이와 플루토는 환타지아를 찾기 위해 스타 시티로 향하고, 어리버리해 보이는 시골 경찰 딕슨에게
그렇게 위기의 시간이 다가온다.
칼 프랭클린(Carl Franklin) 감독의 '광란의 오후(One False Move, 1992)'는 잔혹한 살인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안하고 흥분하기 쉬운 레이(빌리 밥 손튼 분)와는 달리 플루토(마이클 비치 분)는 뛰어난 두뇌와 침착성으로
서슴없이 마약상들을 죽이고 마약을 탈취한다. 이 장면을 보는 것은 꽤나 곤혹스럽다. Pluto(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의 신
Hades의 영어식 명칭)라는 이름처럼 그는 자신에게 방해되는 것은 칼을 사용해 무엇이든 저승으로 보낸다.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혹한 살인마로 실질적인 강도단의 리더인 그는 흑인이다.
이
영화에서 '인종'이란 요소는 매우 중요하고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레이의 부주의하고 다혈질적인 성향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도
플루토이다. 마약에 절은, 팔에는 지저분한 문신으로 도배한 레이는 전형적인 백인 루저의 모습을 보여준다. 레이의 흑인 애인
환타지아는 이 강도단에서 제일 하부에 위치하고 있다. 새된 목소리로 우는 소리나 하고 약하게 보이지만, 자신이 가진 성적 매력으로
레이를 조정하며 마약 탈취극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는 대범함을 가졌다. 영화에서 이 기묘하고 불안정한 3인조 강도단의 이야기가
서사의 한 축을 이룬다.
빌리 밥 손튼은 시나리오 작가 톰 에퍼슨과 함께 공동으로 작업에 참여했다. 남부 아칸소 출신인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남부의
정서와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광란의 오후'에 밀어 넣었다. 빌 팩스턴이 연기한 시골 경찰 딕슨은 남부인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현명하고 따뜻한 성품의 아내와 8살 난 딸이 있는 그에게는 시골 사람의 순박한 정서가 엿보인다. 딕슨은 LA에서 온
경찰 콜과 맥필리를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환대한다. 그는 콜에게 시골에서 벗어나 LA 경찰이 되고 싶다는 꿈을 털어놓지만,
그의 이런 솔직함과 순진함은 콜과 맥필리에게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된다.
딕슨이 없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진 두 경찰의 대화는 도시인이 시골 사람에게 가진 편견과 우월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도시 경찰들은 뭐 좀 대단한가? 백인인 콜은 알콜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커피를 달고 사는 것은
물론 수시로 술을 마신다(아침 해장술로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흑인 동료 맥필리는 비만으로 탐식하는 성향이 있음을
드러낸다. 이 영화가 그렇게 삽화적으로 묘사하는 경찰의 모습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그렇게 또 다른 한 축으로 진행되는 경찰들의 서사는 강도단의 도착을 기다리며 이어진다. 처음의 강렬한 도입부에 비해 이후의
이야기들은 좀 늘어진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추격전도 총격전도 없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만 나누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얼핏
보기에 싸구려 B급 영화, 마약과 범죄가 등장하는 그저 그런 exploitation 영화 같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도시와 시골의 격차, 인종 갈등 같은 다층적인 문제들이 드러난다.
"난 감옥에 갈 만한 죄를 짓지 않았어. 경찰의 말은 거짓이야. 흑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거라고 보는 그 시각이 유죄라고."
고향에 도착한 환타지아는 마중하러 온 동생이 경찰에게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묻자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오는 길에 이미 순찰
경찰을 쏘아 죽인 환타지아는 결코 무죄가 아님에도 뻔뻔하게 그런 말을 뱉는다. 이런 인종 문제는 환타지아의 어린 아들이 딕슨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에 이르면 기이한 울림을 준다. 환타지아의 동생은 자신의 조카를 'half-mixed'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옅은 피부색의 그 아이를
보며 딕슨은 죄책감과 고통을 느낀다. 경찰로서 환타지아를 체포해야한다는 의무감과 인간적인 감정 사이에서 딕슨은 갈등한다.
딕슨이란 캐릭터는 그렇게 미국의 역사, 노예제의 본산지였던 남부의 원죄와 부채의식을 상기시킨다.
레이와 플루토의 도착은 결국 광란의 혈투로 이어진다. 플루토의 칼에 찔린 딕슨은 구급차를 기다리며 땅에 누워있다. 칼 프랭클린은 해가 내려쬐는 뜨거운 한낮의 참혹한 풍경 속에 미국이 가진
근원적 문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딕슨이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남부의 그 땅에는 인종 차별과 내전, 폭력의 기억이 드리워져
있다. 오래 전의 피냄새는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진다. '광란의
오후'를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칼 프랭클린이 보여주는 응집된 캐릭터 묘사, 역동적이고 경제적인 화면 구성과 주제 의식은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이다. 영화의 제목 'One False Move'는 백척간두의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수 있는 한 끗의 실수를 의미한다.
피와 폭력의 세계에서 one false move는 죽음과 같다. 매우 음울한 영화이지만, 살아남은 딕슨과 아이의 존재는 희망의
빛을 옅게나마 드리운다.
*사진 출처: listal.com 딕슨 역의 빌 팩스턴(Bill Paxton)은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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