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Another Sky'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좋은 교육을 받았다. 옥스포드에서 영문학을 배우던 그는 학위를 따려면 중세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학교를
떠났다. 재학 중에 그는 훗날 영국 프리 시네마(Free cinema)의 주역으로 떠오른 카렐 라이츠, 린제이 앤더슨과 친구가
되었다. 영화에 대한 흥미는 곧 직업적 경력으로 이어졌다. 편집과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자신의 영화도 찍었다. 어렵게 찍은
영화는 개봉도 하지 못했다. 그의 영화 경력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이유없는 반항(1955)'으로 유명한 감독 니콜라스
레이의 개인 비서가 되었고, 레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도 맡았다. 동성애자로서 그는 레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자신이 보고
들은 할리우드 배우들의 개인사에 관심을 가지고 전기 작가로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개빈 램버트(Gavin
Lambert), 'Another Sky(1954)'는 그가 남긴 유일한 영화이다.
젊고 단아한 영국 여성
로즈는 부유한 중년 여성 셀레나의 비서로 일하기 위해서 낯선 나라 모로코로 왔다. 로즈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롭다. 셀레나가
잘생긴 한량 마이클을 애인으로 두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모습에도 익숙해진다. 로즈는 나이든 현지인 통역 아흐메드의 안내를 받아
마라케시 곳곳을 탐방하며 이국 생활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어느 날, 셀레나와 마이클을 따라 간 파티에서 로즈는 젊은 악사
타예프에게 반한다. 아흐메드의 도움을 받아 타예프와의 밀회를 이어가던 로즈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이별을 결심한다. 로즈는
타예프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하지만, 타예프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타예프를 꼭 만나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로즈는
셀레나의 돈까지 훔쳐서 타예프를 찾아 나선다.
이 영화에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모로코의 풍광과 현지인들의
모습이다. 마치 민속지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의 이 영화는 매우 충실하게 1950년대 모로코의 모습을 담는다. 로즈가 둘러 보는
시장의 모습들은 다채롭다. 코브라 쇼, 민속 악기 공연, 미로처럼 얽힌 주거 지역의 골목길, 온갖 토속 물건을 판매하는 상점들은
영화의 이국성을 배가시킨다. 그 이국성의 정점은 로즈가 타예프를 찾아 헤메는 사막에서 절정을 이룬다. 뜨거운 모래 바람이 부는
사막에서 로즈는 길을 잃는다. 영화가 모로코의 풍경을 담아내는 방식은 조화롭게 이루어지며, 그것은 영화의 서사와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셀레나를 비롯해 그 주변인들이 보여주는 현지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우월적 지위는 명백해 보이지만, 로즈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고 결국 거기에서 이탈한다. '사랑'은 로즈가 가진 모든 것을 던져버리게 만든다.
얼핏
보기에 그 사랑은 제국주의로 대표되는 백인 여성의 젊은 현지 남성에 대한 기묘한 열정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 개빈 램버트의 성 정체성은 그에 대한 다른 해석을 요구한다. 타예프를 로즈의 애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분명히 램버트의
개인적 욕망의 투사가 들어가 있다. 로즈의 사랑은 무모하고, 용인받지 못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타예프와의
밀회에서 로즈는 타예프를 비롯해 만남을 중개하는 아흐메드, 마차꾼에게 돈을 지불한다. 그것은 감정의 교류가 아닌 '거래'일
뿐이다. 그 거래는 죄의식과 수치심을 동반한다. 그럼에도 로즈는 자신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부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로즈는 마침내 사막으로 떠난다.
'사막'이란 장소가 갖는 무국적성은 자유와 해방, 일탈과 모험을 가능하게
한다.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6)'의 알마시 백작의 절절한 불륜의 사랑이 펼쳐지는 장소도
사막이었다. 여러 할리우드 영화들이 이 '사막'의 공간성을 정형화된 방식으로 소비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사랑(The Sheltering Sky, 1996)'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결혼 10년차의 권태기에 접어든 미국인
부부 포트와 키트는 알제리로 여행을 떠난다. 이들에게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여행은 그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끈다. 이국의 도시와 사막에서 삶의 새로운 활력을 찾는 것처럼 보였던 부부에게 불운이 찾아온다.
포트는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음에 이르고, 키트는 남편을 떠나 사막을 무작정 헤맨다. 아마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는 극악의 텍스트로
여겨질 이 영화에서 키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현지인의 성적인 착취와 유린을 사랑의 감정으로 혼돈한다. 키트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스스로 낯선 나라의 '길 잃은 자'가 되기를 택한다.
'마지막 사랑'은 1949년에 폴
보울스(Paul Bowles)가 쓴 'The Sheltering Sky'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인이면서 모로코 탕헤르로
이주해서 생의 대부분을 보낸 그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이였다. 현대 음악 작곡가였으며, 작가로서도 활동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The Sheltering Sky'는 출간 당시에 큰 인기를 얻었다. 젊은 부부가 이국의 여행지에서 겪게 되는 비극이
개빈 램버트에게도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영화의 제목 'Another Sky'는 그 소설의 영향력을 드러낸다.
'사막'이라는 공간, 그리고 엇나간 일탈의 사랑이라는 보울스의 소설에서 차용한 요소를 램버트의 영화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서사화한다. 원작자 폴 보울스도 램버트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였다. 그들이 선택한, 그리고 매혹된 '사막'이란 장소는 기이한 울림을
준다.
결국 'Another Sky'의 로즈는 감독 개빈 램버트의 영화적 자아인 셈이다.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되는 동성애자로서 그는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혀 기꺼이 사막에서 길을 잃으며, 그곳에서 남아있기를 원한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로즈의 타예프를 향한 욕망을 죄악시하지 않는 이 세상의 유일한 장소로서 사막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로즈는
자신을 구해준 현지인의 아내가 되어, 그들의 옷을 입고 사막의 흙집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영화는 '로즈라는 여자는 5년
전에 이 사막에서 죽었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사막에서의 그 '죽음'은 로즈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한다. 자신을 옥죄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동성애자 감독 램버트의 바램은 그렇게 영화적으로 실현된다.
*사진 출처: mom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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