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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환상의 삶을 택한 남자, 엔리코 4세(Enrico IV, 1984)

 

*이 글에는 영화 '엔리코 4세'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는 연극학 전공자들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희곡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는 작가가 창조한 희곡 속 등장인물들을 두고 모델이 된 실제 인물들의 싸움이 리허설 장면에서 펼쳐진다. 현실과 허구를 오가는 이 독특한 희곡은 피란델로의 대표작으로 그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진짜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그가 1921년에 쓴 희곡 '엔리코 4세'에도 그런 질문이 동일하게 반복된다. 여기에, 피란델로는 '광기'라는 요소를 추가한다. 작가는 자신이 역사 속 인물 '엔리코 4세'라고 믿는 광인의 이야기를 통해 정상과 비정상, 현실과 환상, 기억과 정체성에 대해 다룬다. 이탈리아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Marco Bellocchio)의 1984년작, '엔리코 4세(Enrico IV)'는 피란델로의 희곡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차에 탄 이들이 한적한 시골에 자리한 성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성에는 20년전의 낙마 사고로 정신이상이 된 놀리 후작의 삼촌이 살고 있다. 자신이 '엔리코 4세'라고 믿는 남자는 부유한 여동생의 경제적 지원으로 미친 왕 노릇을 하며 살 수 있었다. 그에게는 시종들과 광대도 있다. 왕관을 쓰고 왕의 복장을 한 엔리코 4세와 중세의 옷을 입은 시종들과 광대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놀리 후작은 삼촌의 정신병을 낫도록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그곳에 왔다. 정신과 의사, 엔리코 4세의 젊은 시절의 친구 벨 크레디, 젊은 시절 엔리코 4세가 짝사랑했던 마틸다, 마틸다의 딸 프리다가 광인의 치료를 위한 사이코 드라마의 배역을 연기한다. 엔리코 4세에게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배역을 맡는다. 엔리코 4세(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하인리히 4세의 이탈리아식 발음)의 정적이었던 카노사의 성주 마틸다를 비롯해 교황의 사절, 수도승, 엔리코 4세의 젊은 시절의 연인, 이렇게 20세기의 현대인들은 중세의 복식을 갖추고 광인 엔리코 4세의 과거와 내면 세계로 들어간다.

  치료를 가장한,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이 희한한 연극은 엔리코 4세(그는 이름이 없으며 '폐하'로 불릴 뿐이다)가 미쳤다는 전제하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연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들이 배역을 나누고 대사를 외우는 장면이 엔리코 4세에 의해 포착된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진짜 왕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악사들에게 연주를 지시하고, 시도 때도 없이 광기를 표출한다. 왕은 정말 미친 것일까? 엔리코 4세는 자신을 위해 연극하는 이들의 허를 찌른다. 수도사를 연기하는 정신과 의사에게 클뤼니(중세 수도원으로 유명한 도시)로 가는 빠른 길이 어딘지 아느냐고 짐짓 시험하듯 물어 본다. 의사는 쩔쩔매며 대답을 얼버무린다. 이 미친 왕은 그곳에 가는 길에 해산물 식당이 유명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악사들에게는 그들이 다 돈 받고 일한다는 거 안다는 말도 한다. 왕은 그들의 중세식 가짜 이름이 아닌, 진짜 이름도 다 알고 있다.

  영화는 원작 희곡을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 희곡은 현실과 과거가 인물들의 대사를 따라 어지럽고 복잡하게 교차되어 나타난다. 영화는 플래시백(flashback)으로 비교적 간명하게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원작이 가진 난해함은 영화 밑바닥에 여전히 깔려있다. 벨로키오 감독은 원작 희곡의 엔리코 4세의 독백을 상당부분 생략했다. 또한실험적인 시도 대신에 전통적인 서사를 선택했다. 엔리코 4세가 보여주는 광기와 정상의 모호한 경계를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 여기에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탱고 음악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잊을 수 없는 영화 음악까지 더해진다. 영화에 흐르는 '망각(Oblivion)'은 매우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다.     

  자신을 진짜 왕이라고 믿는 남자의 광기는 치료되었을까? 시작부터 어설펐던 방문자들의 연극은 실패로 돌아간다. 선글라스를 쓰고, 담배를 피우는 왕은 20년 전, 자신을 말에서 떨어뜨린 사람이 연적이었던 벨 크레디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그는 광인으로 연기하면서 살아왔다. 광인의 삶은 불행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스스로 광기를 인생에 불어넣은 이 남자는 자신이 구축한 가짜의 세계 속에서 안식을 느끼며,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 '진짜'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방문자들의 시도를 그는 좌절시킨다. 엔리코 4세가 아닌 평범한 중년 남자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는다. 그가 벨 크레디를 칼로 찌르는 것은 단지 과거의 일에 대한 복수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그는 진짜 광인이 되어, 이제까지 살아왔던 '왕'으로서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지켜내고자 한다.   

  루이지 피란델로가 '엔리코 4세'를 쓴 것은 1921년, 초연이 된 것은 이듬해인 1922년이었다. 그 해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재자 무솔리니가 집권한 해였다. 피란델로는 파시즘을 지지했고, 무솔리니 정권과 영합하는 행보를 보였다. 어떤 면에서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제시한 거대한 환상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독재자가 설계한 환상의 세계를 진짜라고 믿었던 이탈리아 국민들은 쓰디쓴 배반의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피란델로의 '엔리코 4세'의 주인공은 보잘 것 없고 별 볼 일 없는 현실 대신에 광기와 거짓으로 가득찬 '왕'의 삶을 택한다. 그의 모습은 기묘하게도 기만적인 가면을 쓰고 이탈리아 정치계에 등장했던 무솔리니와 닮아있다. 영화의 마지막, 미친 왕의 칼에 찔린 벨 크레디와 함께 방문자들은 황급히 퇴장한다. 왕은 자신의 성채와 광기 속에 다시 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관객들은 '엔리코 4세'에서 현실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광기와 환상의 견고한 힘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 출처: it.wikipedia.org   엔리코 4세를 연기한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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