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방관자의 기억 속으로, 승객(Pasażerka, Passenger, 1963)

 

  남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촬영 중이었다. 원래는 40분 정도로 찍으려 했던 대본은 1시간 분량으로 늘어났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조사 자료들이 쌓여갔고, 영화 촬영은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이미 찍어 놓은 필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폐기하기도 했다. 수용소 장교 숙소에 머물면서 촬영했던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트럭과 정면 충돌한다. 마흔 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63년, 그의 동료 감독 비톨트 레시에비츠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영화를 최종 편집하고 완성한다. 안제이 뭉크(Andrzej Munk) 감독의 유고작 '승객(Pasażerka, Passenger)'은 그렇게 관객과 만나게 되었다.

  리자는 남편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중간 기착지 항구에서 자신이 예전에 알던 여자와 흡사한 외모의 승객이 타는 것을 보고 리자는 놀라서 얼어붙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나치 친위대 감독관으로 복무했던 리자는 수감자 마르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리자는 남편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들려준다. 고통스런 과거로의 여행은 다음 기착지에서 중단된다. 마르타와 닮은 외모의 승객이 내리고, 리자는 비로소 안도한다.

  폴란드의 작가 조피아 포즈미스는 1959년에 라디오 방송 드라마 대본으로 '45번 칸의 승객(Passenger from Cabin Number 45)'을 썼다. 포즈미스는 독일에 항거한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종전과 함께 풀려났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될 때 포즈미스가 탔던 칸의 번호가 45번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쓴 라디오 드라마에 뭉크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1년에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1963년에 영화가 개봉된 것과는 별개로 원작자 포즈미스는 1962년에 이전의 라디오 대본에 이야기를 추가해 책으로 펴냈다. 소설을 바탕으로 1968년에는 소련에서 오페라 작품이 만들어졌다. 원작 텍스트의 다양한 변용 가운데 영화 '승객'이야말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극명하게 드러낸 유명한 작품으로 남았다.

  영화는 현실의 리자가 과거를 회상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적 순서에 따른다. 현실 부분은 영화의 스틸컷 사진이, 과거의 회상은 필름 촬영분으로 되어 있고, 리자의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voice-over)로 깔린다. 리자는 남편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회상에서 과거의 과오를 최대한으로 합리화한다. 마르타가 애인 타데우스와 만나게끔 주선해 주고, 그들의 행동을 묵인하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스스로를 미화한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회상 장면에서 리자는 자신에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 마르타를 괴롭히고, 애인과의 만남도 금지시켜 버린다. 아무것도 모른채 가스실로 줄지어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거나, 경비견들이 수감자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것에도 무감각한 모습을 보인다. 마르타는 방관자로서의 리자를 비아냥거리면서 리자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든다. 둘 사이의 권력 관계는 겉으로는 명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르타는 리자와의 심리적 대결에서 결코 무기력하게 밀리지 않는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여러 영화들 속의 가해자-피해자 구도와는 달리, '승객'은 학살의 방관자 내지는 동조자로서의 캐릭터를 부각시킨다. 리자는 정말로 사악한 인물인가? 마르타에게 보여주는 리자의 행동들은 양가적(兩價的)이다. 유대인들의 소지품 분류 창고를 담당하는 리자는 압수물품으로 들어온 유모차 속의 아기 울음 소리를 듣는다. 동료 감독관은 아기를 찾아내어 죽이려하지만, 리자는 마르타가 유모차를 확인하게 하고 인형을 건네는 마르타를 추궁하지 않는다. 또한 학살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마르타를 제외시켜버리는 결정을 내린다. 관객들은 리자의 독백과 재현된 과거의 기억 속에서 과연 리자의 참모습은 무엇이며, 진실은 무엇인지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리자가 목격한 유람선의 여승객이 진짜 마르타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관객들은 피해자로서의 마르타의 증언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리자와 과거 수용소에서의 일에 대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은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비극에 다양하게 접혀진 이야기들이 존재함을 드러낸다. 안제이 뭉크 감독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느꼈던 어려움도 그런 것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영화 속 리자의 기억과 함께, 관객들은 뭉크 감독이 의도한 원래의 이야기도 오로지 추측과 상상으로만 메꾸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는다.

  동시대의 알렝 레네가 다큐멘터리 '밤과 안개(Nuit Et Brouillard, Night And Fog, 1956)'로 학살의 실체적 진실을 보여주었다면, 뭉크는 학살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기억과 그 이후의 삶을 다룬다. 어떤 식으로든 기억은 왜곡되고 흐려지며, 학살에 개입된 여러 입장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윤리적 도덕적 오점을 덜어내기 위해 애쓰기 마련이다. 그 기억의 가역성과 모호함을 드러내는 예는 압수물품으로 들어온 유모차에 있었던, 또는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아기'에 대한 것이다. 빠르게 지나간 유모차는 화면에서 사라졌고, 곧이어 마르타는 인형을 가져온다. 리자와 동료 감독관을 비롯해, 관객들도 분명히 아기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 과연 아기는 거기에 있었는가? 마르타가 아기를 숨기고 인형을 잽싸게 찾아 건넨 것인가? 처음부터 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영화 속에서 아기의 존재에 대한 정보는 더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수용소 생존자로서 원작자 조피아 포즈미스를 지칭했던 제목 '승객'은 뭉크의 영화에서는 수용소 감독관 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너무나도 명백한 피해자의 학살의 기억은 방관자의 기억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고 편집되어서 구술된다. 불완전한 리자의 기억 속에서도 참혹한 수용소의 모습과 그곳을 채운 죽음의 자취는 생생하게 재현된다. 영화 '승객'을 통해 안제이 뭉크는 역사적 비극과 그것을 조망하는 인간의 기억과 시간의 문제를 들여다 본다. 


*사진 출처: mini-cinema.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