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열대어'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학생 류즈창에게 학교는 수용소 같다. 수용소장 같은 무서운 여자 담임은 툭하면 몽둥이 체벌로 아이들을 훈육하며, 공부 못하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입버릇처럼 강조한다. 학업에 뜻이 없는 류즈창은 친구와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틈나면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류즈창과 친한 동네 꼬마 다오난이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우연히 마주친 다오난의
납치범들에게 류즈창도 잡히는 신세가 된다. 납치를 주도한 보스가 사고로 죽자, 부하 칭자이는 궁리 끝에 아이들을 자신의 고향 어촌
마을로 데려간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칭자이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인간적으로 친해진다. 납치 사건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가운데, 궁핍한 살림의 칭자이의 가족들은 류즈창의 몸값을 받아내 인생역전의 기회를 노린다. 과연 이 어리버리한 일가족 납치단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열대어(熱帶魚)'는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첸유순(陳玉勳) 감독의
1995년도 작품이다. 주로 상업용 광고 작업을 많이 했던 감독의 재치있고 기발한 감각은 영화 속 여러 장면에서 돋보인다.
류즈창이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상상 속 바다에서 잠수정을 타고 구해내는 장면이라든지, 칭자이 일가족의 우스꽝스러운 협박 전화를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그렇다. 기본적으로 코미디의 정서를 밑바닥에 깔고 있음에도,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류즈창은 고교 입학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그 시험은 마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관문처럼 여겨진다.
방송에서는 납치된 류즈창의 안위 보다도, 류즈창이 시험을 볼 수 있을 것인가를 비중있게 다룬다. 그의 아버지와 시장 후보는 방송
인터뷰에서 납치범에게 류즈창을 풀어줄 것을 호소하는데, 그 이유가 시험을 치루지 못해 '인생을 망치는' 불행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학 입학 시험이 아니라, 고교 입학 시험으로 온나라가 들썩거리는 이 입시 공화국에서 비록 납치된
처지에 있다고 해도 류즈창은 공부를 해야 한다. 칭자이는 류즈창이 시험 준비를 할 수 있게 여동생이 썼던 참고서를 주고, 심지어
새책을 사다 나르기까지 한다. 납치범의 고향집은 졸지에 기숙 학원이 되어버린다. 자신이 살던 타이페이에서는 뜬구름 잡듯 시간을
낭비했던 중학생은 새삼 공부에 집중하며, 도시와는 다른 어촌 마을의 풍광과 그곳 사람들의 인정에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 어촌
마을의 삶은 결코 한가롭고 낭만적이지 않다. 칭자이와 그의 가족들의 삶은 팍팍하며 궁핍하기 짝이 없다. 칭자이의 이모는 임신한
며느리와 아들 내외를 부양하기 위해 서커스 공연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바닷가에 면한 집 바닥에는 늘 물이 흥건히 들어차
있으며, 류즈창이 좋아하게된 칭자이의 여동생 아주안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고 굴까는 일로 돈을 번다. 고향을 떠나 타이페이에서
돈을 벌고자 했던 칭자이의 꿈은 좌절되었고, 그는 아이들의 몸값을 요구하는 납치범으로 전락해 버린다. 첸유순은 무언가 허술해
보이는 이 코미디 영화에서 대만의 지독한 입시 경쟁과 도농간의 소득 격차라는 사회 문제를 다룬다.
공부 못한다고
받는 가혹한 체벌의 일상을 류즈창이 견디는 방법은 '공상'이다. 이 중학생은 바닷속에 아이들의 꿈만을 먹는 물고기가 있는데,
9,999개의 꿈을 먹으면 날개를 펴고 날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류즈창이 칭자이의 고향 바다에서 본 열대어는 어쩌면 그 상상 속
물고기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괴롭고 비참할수록 상상의 나래는 더 아름답게 채색되는 법이다. '열대어'의 등장
인물들은 상실의 상흔을 가지고 있다. 류즈창은 한쪽 귀의 청력이 소실되어 보청기를 끼고 있고, 칭자이의 남동생은 불편한 한 쪽
다리를 끌면서 다닌다. 칭자이의 할머니는 치매로 인지능력이 손상되었다. 류즈창과 함께 납치된 다오난은 미혼모의 아이로 그의 엄마는
남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그들이 처한 현실은 불완전하며 고통스럽다.
류즈창의 미래를 위해 칭자이의 가족들은 몸값을 포기하고 납치극을 끝내기로 한다. 시험을 보기 위해 타이페이로 떠나는 류즈창에게 아주안은 열대어가 담긴 작은 어항을 선물한다.
"너처럼 꿈을 꾸는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 인생은 힘들어도 헤쳐나가야만 하는 거야."
감독 첸유순은 다소 투박하지만, 자신만의 영화 언어로 대만의 사회적 현실과 사춘기 소년의 내면을 그려낸다.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 '열대어'에는 잔잔한 웃음과 함께 가슴 뻐근한 슬픔이 흐르고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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