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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주의하고 나른한 청춘의 얼굴들, Last Summer(1969)

 

  아주 오래전에 EBS '세계의 명화'에서 'The Swimmer(1968)'를 방영한 적이 있다. 버트 랭카스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독특하고 기이한 작품으로 내 기억에 남았다. 아주 가끔씩,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버트 랭카스터가 수영복 차림으로 비를 맞으며 야외 수영장을 배회하는 장면이었다. 그 시절 헐리우드에서 저런 영화도 만들 수 있다니 참 놀랍네,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프랭크 페리(Frank Perry)였다. 'Last Summer'는 그가 이반 헌터(Evan Hunter)의 소설을 원작으로 1969년에 만든 영화이다. 1968년, 미국 영화에 새로운 등급 시스템이 도입된다. 'MPA(Motion Picture Association) film rating system'은 기존의 검열 제도인 'Hays Code'를 대체했다. 'Last Summer'는 새롭게 만들어진 등급 시스템에서 'X 등급(Rated X; 16세 미만 관람 불가)'을 받았는데, 이는 TV 방영은 물론 일반 상영에서도 상당한 제약을 받는 등급이었다. 영화가 어떤 장면을 포함하고 있길래 그런 판정을 받았을까? 십대들의 방종하고 타락한 여름을 그린 이 영화는 오랫동안 과소평가되고 잊혀져 있었다.

  영화는 부유한 이들의 여름 별장지인 Fire Island의 해변가를 배경으로 한다. 샌디(바바라 허쉬 분)는 해변에서 낚시 바늘에 목을 다친 갈매기를 발견한다. 마침 지나가던 피터(리처드 토마스 분)와 댄(브루스 데이비슨 분)이 샌디의 갈매기 치료를 돕는다. 피터와 댄은 매력적인 샌디의 호감을 사려고 애를 쓰고, 샌디는 그들을 조종하며 군림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어느 날, 해변가에서 샌디가 갈매기를 끈으로 묶어 애완 동물처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본 로다(캐서린 번즈 분)는 샌디를 비난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던 로다는 차츰 그 세 명과 가까워진다. 로다는 피터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피터는 댄과 함께 샌디에게 매혹되어 있다. 제멋대로인 샌디는 로다에게도 지배적인 힘을 휘두르려 한다. 샌디는 전화 데이트 서비스로 만나게 된 푸에르토리코 남자를 골탕먹이기 위한 미끼로 로다를 내세우고, 남자가 동네 불량배들에게 얻어맞도록 내버려 둔다. 로다는 그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샌디는 그런 로다를 무시하며 비웃는다. 그리고 마침내 샌디의 사악하고 잔혹한 면모는 로다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내몬다.

  영화에서 시종일관 도발적인 비키니를 입고 나오는 샌디는 성적인 매력으로 피터와 댄을 굴복시킨다. 그 세 명은 마치 하나의 몸을 이루어 같은 사고를 하는 유기체처럼 행동한다. 자신의 손을 쪼았다는 이유로 갈매기를 돌로 쳐서 죽여버리는 샌디의 행동은 이제부터 시작될 일탈의 신호탄 같다. 샌디의 어머니는 내연남과 어디론가 떠나서 별장은 비어있다. 그 빈 집은 부유하고 자유분방한 십대들의 방종의 공간이 된다.

  대마초 흡연과 성적인 일탈, 이것은 이 영화와 같은 해에 만들어진 '이지 라이더(Easy Rider, 1969)'와 기이한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마치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에서 무인도에 난파된 소년들이 야만성에 물들어가듯, 샌디의 비도덕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은 피터와 댄의 내면을 지배한다. 처음에 갈매기에서 시작했던 것이 사람으로 향한다. 야만의 3인조는 중년의 남자를 술 취하게 만들어 불량배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온다. 이 막 나가는 십대들에게 브레이크란 없다. 수줍고, 보수적이며, 도덕성을 지닌 로다는 샌디에게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샌디는 포식자들처럼 로다를 제압하고 지배력을 과시한다. 그렇게 샌디와 피터, 댄이 로다를 향해 드러내는 포식자의 야만성은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을 이룬다.

  이런 영화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영화가 주는 정서적인 불편함과 충격의 파장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Last Summer'는 당시 히피 세대의 일그러진 부분을 조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가 내포한 계급적 논의 또한 무시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여름 방학에 바다가 보이는 멋진 별장에 머물며, 요트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부유한 십대에게 금지된 것은 없다. 샌디의 저속하고 불온한 언사, 지배적인 성향, 그 모든 것은 샌디가 가진 계급적 특권 속에 포함되어 있다. 샌디는 자신에게 부여된 일탈의 권리를 마음껏 누린다. 그것은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대상(로다)에 대한 폭력으로 확장된다. 영화 'Last Summer'가 보여주는 약자에 대한 지배 계급의 잔혹성은 관객에게 지속적인 불안을 안겨준다.

  'Last Summer'는 영화의 35밀리 필름 프린트가 모두 소실되었다. 2001년에 호주 국립 영상물 아카이브에서 16밀리 프린트가 발견된 것이 유일하다. DVD 발매는 요원한 일이며, 오늘날의 관객들은 화질이 좋지 않은 VHS 영상으로 감상할 수 밖에 없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잊혀지고 버려졌다. 프랭크 페리가 자신의 영화들에서 보여준 비주류적 감수성은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고, 그것이 그의 영화의 불운한 현재 상태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는 세월의 우물 밑바닥에서 다시금 끌어올려질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다. 'Last Summer'가 보여주는 시대적 정서, 아울러 1970년대의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세대, 계층간의 갈등에 대한 예언적 상징성은 놀랍다. 부주의하고 나른한 청춘이 가진 포식자의 얼굴을 프랭크 페리는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포착한다.


*사진 출처: cine.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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