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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샨 마카베예프의 첫 영화적 비상, 인간은 새가 아니다(Čovek nije tica, Man Is Not a Bird, 1965)

 

  두샨 마카베예프(Dušan Makavejev) 감독의 'WR: 유기체의 신비(W.R.-Misterije organizma, 1971)'를 영화사 교과서에서 글로만 보았던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희귀한 예술 영화 자료들은 구하기가 힘들어서, 책 속에서 영화 제목을 읽고 마치 신화 속의 황금 양털을 상상하듯 그렇게 생각만 했었다. 이제는 그 영화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는데도, 영화를 보려는 마음이 나지 않는다. '저주받은 걸작', 시놉시스만 봐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영화, 아마도 'WR: 유기체의 신비'는 영화 보기의 전위적 모험을 하려는 사람에게 적합한지도 모른다. 그럼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데뷔작은 어떨까? '인간은 새가 아니다(Čovek nije tica, Man Is Not a Bird, 1965)'는 의외로 점잖다.

  마치 제정 러시아 말기의 혹세무민의 상징이었던 수도승 라스푸틴을 연상케 하는 최면술사의 등장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관객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최면술' 공연을 하고 있는 참이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서사 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주된 플롯이 광산 마을 보르(Bor)에 파견된 발전기 엔지니어 루딘스키와 젊은 여성 라이카의 연애담이라면, 하위 플롯으로 무식하고 천박한 공장 노동자 바르뷸로빅과 아내의 이야기가 자리한다. 거기에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촬영된 공장의 모습과 노동자들의 일상, 황량하고 건조한 광산 마을 일대의 풍경, 마을을 방문한 서커스 장면들이 중간 중간 들어가 있다. 이런 서사의 불균일성은 관객에게 낯설음과 불편함을 선사하지만, 소화못할 정도는 아니다.

  1960년대를 휩쓸었던 새로운 영화 사조 누벨 바그(Nouvelle Vague)는 동유럽 국가 유고슬라비아에도 도착했고, 그것은 'Black Wave'로 탄생했다. 개인주의적인 경향, 정부에 대한 비판적 성향을 지닌 영화 창작의 흐름에 두샨 마카베예프도 동참했다. '인간은 새가 아니다'를 통해 마카베예프는 자신만의 영화 문법을 제시한다. 다다이즘(Dadaism)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최면술사의 공연 장면을 비롯해, 마을 주변부의 황량한 풍경을 촬영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풍경처럼 보이는 갈라진 진흙길을 걷는 연인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선전 도구로 제작된 노동자의 커다란 손들이 그려진 공장 벽의 걸개 그림과 제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에서는 네오 리얼리즘(Neorealism)이 보인다. 마카베예프는 거기에 통속적인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촌스럽다고 생각될 정도의 극적인 영화 음악이 등장할 때는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광산 마을에 발전기 설비 제작을 위해 잠시 파견된 중년의 엔지니어 루딘스키는 동네 이발소의 매력적인 아가씨 라이카의 구애를 받는다. 루딘스키는 처음에는 그 접근을 거부하지만, 결국 라이카와 연인 사이가 된다. 한편 공장의 일꾼 바르뷸로빅은 음주와 불륜 문제로 아내에게 고통을 준다. 루딘스키가 이끄는 설비팀은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치고, 정부에서는 그 공로로 훈장을 수여하고 축하 음악회까지 열어준다. 라이카는 곧 떠날 루딘스키를 버리고, 트럭 운전 기사 보리스와 사귄다. 루딘스키는 라이카에게 분노하지만, 늙은 남자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아니, 이런 줄거리로 러닝 타임 81분을 어떻게 채우는가 궁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파편화된 내러티브들로 매우 산만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마카베예프와 영화 제작팀은 영화 제작 전에 광산 마을에 머물면서 다양한 주민들의 실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취재했다. 마카베예프는 거칠고 팍팍한 하층 노동자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노동력을 쥐어짜내기 위해 국가의 정치적인 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국가는 계속적인 프로파간다로 노동자를 산업 역군으로 치켜세우지만, 그들의 실제 삶은 음주와 폭력, 태업과 절도(공장에서 철근을 훔쳐내는 장면이 나온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노동자라고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니다. 고급 엔지니어 루딘스키의 노동은 국가의 인정을 받고 치하의 대상이 된다. 그의 훈장 수여식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는 기묘한 이질성을 풍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는 전 인류의 화합과 단결을 촉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외치는 이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엄연히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한다. 마카예프가 영화 속에서 등장시킨 최면술사와 서커스 공연은 그런 현실로부터 노동자들을 차폐시키고 사회주의의 환상 속에 가두는 국가 권력의 기만성을 상징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우리말로 '남자는 새가 아니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Man을 '사람'이 아닌 '남자'로 번역한 명백한 오역이다. 영화에서 설비 작업 도중 공중에 걸린 밧줄 사다리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인부를 보고 루딘스키가 소리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은 새가 아니라구!' 루딘스키의 말은 마치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강제하는 명령처럼 들린다. 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버리고, 지상에서의 노동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땅에 매인 노동자의 삶에서 탈출과 비상은 허락되지 않는다. 마카베예프는 그런 현실에서 성 정치학을 반영한 영화로 새로운 출구를 꿈꾸었다. '인간은 새가 아니다'는 마카베예프의 첫 영화적 비상(飛翔)으로 이후에 이어질 그의 영화 여정에 대한 여러 단서들이 내포되어 있다.

  

*사진 출처: janusfilm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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