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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지역의 영화가 갖추어야할 덕목, 레몬 트리(Etz Limon, Lemon tree, 2008)

 

  2004년,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West Bank)에 살고 있던 72살의 노파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샤울 모파즈(Shaul Mofaz)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장관의 집과 25미터 거리에 있는 노파의 과수원을 군부에서 없애 버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노파는 사는 곳이 맘에 안들면 장관이 이사가면 될 것을, 먼저 살고 있는 자신의 땅 근처에 이사와서 땅을 빼앗으려 한다고 말했다. 과수원에 심어진 오렌지와 레몬 나무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전부라고도 덧붙였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안보상의 이유로 나무들을 베는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을 내렸다(출처 Al Jazeera). 이스라엘의 감독 에란 리클리스(Eran Riklis)는 그 사건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영화 '레몬 트리(Etz Limon, Lemon tree, 2008)'를 만들었다.

  영화 속 과부 살마가 제기한 소송 변론에서 변호사는 나무를 베는 것이 성서에도 어긋난다는 말을 한다. 그 부분이 흥미로운데, 실제로 구약 성서의 신명기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한 성을 함락시키려고 포위 공격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거기에 있는 나무를 도끼로 마구 찍어 내지는 말라. 나무에 여는 것을 따 먹어야 할 터인데 찍어 내면 되겠느냐? 들에 서 있는 나무가 사람처럼 너희를 피하여 성 안으로 들어 갈 리 없지 않느냐?" (공동 번역 성서 신명기 20:19)

  과연 성서가 살마의 목숨과도 같은 레몬 나무들을 보호해 줄까? 개인의 재산권은 가볍게 깔아뭉개고 나무를 베어버리려는 군부에 대항해 힘겨운 싸움을 하는 살마. 마을의 촌장은 이길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하면서도 팔레스타인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보상금 따위는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과부의 레몬 나무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 결혼한 딸과 미국에 가서 정착한 아들도 심드렁하기는 마찬가지. 사위가 소개해준 젊은 변호사 지아드만이 살마의 싸움을 지지하고 격려해 준다.

  그런데 그런 살마를 심정적으로 응원하는 이는 또 있다. 살마에게는 적대자라고 할 수 있는 장관의 아내이다. 온정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가진 미라는 살마의 처지를 연민을 가지고 바라본다. 미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보와 관련된 이스라엘의 과도한 규제를 비판한다. 그 인터뷰는 살마에게는 호재이지만, 남편의 입지를 흔드는 일이다. 왜 미라는 장관인 남편과 이스라엘 편에 서지 않는가? 얼핏 보기에 미라의 존재는 '레몬 트리'가 가진 정치적 올바름을 대표하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대로 과수원을 가꾸며 살아온 이의 땅 옆에 이사와서는 테러리스트가 숨을 위험이 있으니 나무를 다 베어버리겠다고 하는 국방 장관의 처사는 분명히 온당치 못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엄연한 정치적 현실이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일방적 정치적 구호는 프로파간다로 전락하기 쉽다. 감독 에란 리클리스는 그런 위험을 매우 영리하게 비껴간다. '레몬 트리'는 첨예한 정치적 갈등을 개인의 차원으로 끌여들이는 전략을 구사한다. 레몬 나무 소송전의 뒤에는 중년 여성의 고독과 슬픔, 가부장제의 억압적 면모가 숨겨져 있다.

  살마에게 레몬 나무는 베어버려도 괜찮은 그냥 '나무'가 아니다. 그 나무에서 나오는 레몬들로 살마는 홀로 아이들을 키워냈다. 남편은 어린 레몬 나무를 심어놓고 세상을 떴다. 이제는 자식들도 제 살길을 찾아 떠났다. 자신이 직접 담근 레몬차를 마시며 바람에 흔들리는 레몬 나무를 보는 것이 살마의 유일한 낙이다. 그런 살마에게 생의 근원이며 버팀목이었던 나무를 잃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나무들이 삶의 전부라고 말한 진짜 뉴스 속 팔레스타인 노파의 이야기는 그대로 살마의 대사가 된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살마는 노파 보다는 좀 더 젊은 사십대 중반의 나이라는 점이다. 집 근처 계곡에서 들리는 늑대 울음소리를 들으면 같이 울고 싶다고 말하는 살마의 내면적 고독은 젊고 야심에 찬 변호사와의 만남으로 공명을 일으킨다.

  촌장을 비롯해 남편의 친구였던 마을 주민들은 살마의 감시자로 등장한다. 그들은 살마에게 죽은 남편의 명예를 생각해서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거실 벽에 음울한 표정으로 걸려 있는 사진 속 남편의 가부장적인 힘은 그렇게 살마에게 출몰한다. 장관의 아내 미라도 그런 가부장제의 영향력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과는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음에도 그것을 공적으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처지의 장관 부인은 마음 기댈 곳이 없다. 남편은 젊고 매력적인 비서와 바람이 난 것 같고, 미국에서 유학 중인 딸은 항상 바빠서 통화하기도 어렵다. 딸과의 대화가 유일한 위로이지만, 그 딸은 혈육이 아니라 입양한 딸이며 미라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미라의 인터뷰는 결정적으로 남편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다. 이렇게 가부장제의 서로 다른 처지의 두 여인은 인생에서 내적인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레몬 트리'를 여성주의적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매우 손쉬운 해석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리 좋은 도구가 아닐 수도 있다. 두 여인은 명백한 연대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단 한 번, 경호원의 눈을 피해 살마의 집에 들어가려고 했던 미라는 살마가 우는 모습을 엿보게 된다. 살마가 울었던 이유는 베어질 '레몬 나무' 때문이 아니라 '젊은 남자' 때문이었다. 물론 미라는 그걸 알지도 못하고, 미라의 시도는 경호원에 의해 좌절된다. 살마에게도 미라는 재수없는 이웃의 아내이지만, 그렇게 나빠보이는 것 같지 않은 여자일 뿐이다. 둘 사이의 유일한 연결 고리라고 할 수 있는 미라의 인터뷰 또한 살마의 입장을 옹호했다기 보다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찰자적 시선에서 나온 것이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이스라엘 관객들에게 그다지 우호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아마도 이스라엘 감독이 만든 영화가 확실하게 '이스라엘 편'에 서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깟 나무 베어버릴 수도 있는 거지, 뭐 저걸 가지고...' 하는 반응이 아니었을까? 분쟁 지역에서 테러의 위험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적과 우리 편의 구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정치적 갈등이 진행되는 현실은 개개인의 실제적 삶에 지속적이고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레몬 트리'가 보여주는 것은 정치와 개인의 삶이 맞닿는 지점에서의 예기치 못한 파열음과 반향이다. 에란 리클리스는 레몬 나무를 둘러싼 소송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현실, 중년 여인의 내면적 풍경을 펼쳐놓는다. 이 영화는 좋은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이 영화를 그저 그런 이스라엘 영화가 될 수 있는 위험에서 구해낸다. 영화 감독이 가져야 할 덕목은 탁월한 정치 감각이 아니라, 인간과 현실에 대한 탐구심이어야 함을 '레몬 트리'는 일깨운다.    


*사진 출처: he.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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