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渡美)하다'라는 단어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희망과 성공을 상징하는 결말로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오래 전 드라마라 제목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시골 마을의 돈푼깨나 있는 여자는 자신의 아들 이름을 그 '도미'로 지었다. 반드시 미국에 가서 성공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주인공이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 장면은 그냥 그 자체로 장밋빛 미래를 뜻했다. 1980년대까지도
한국인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유효했다. 그런데 1960년, 어느 프랑스인에게도 미국은 신기하고 놀라운 나라였던 모양이다. 프랑수아
라이헨바흐(François Reichenbach) 감독이 미국을 둘러 보고 찍은 다큐멘터리 'America As Seen by a
Frenchman'은 당시 미국의 다양한 사람들과 풍광을 담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프랑스인의 미국 탐방기는
미국의 엄청난 소비주의에서부터 시작한다. 상업용 광고 사진을 찍는 사진 작가와 모델들의 작업 과정을 비롯해 곳곳에 넘쳐나는
관광객들이 화면을 장식한다. 이 나라는 그 무엇이든 스케일 면에서 보통을 뛰어넘는다. 꼬마 아이가 주문한 밥솥 크기의 그릇에 담겨
나온 아이스크림(녀석은 그걸 혼자서 맛있게 다 먹는다), 수박 먹기 대회의 아이들, 엄청나게 큰 피자, 너른 마당을 채운 바비큐
화덕... 먹거리에서부터 풍요로움이 넘치는 미국을 보여준다. 먹을 거리 구경은 뭐 별 것도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는 볼
거리도 넘쳐난다. 항공 모함에서 이착륙하는 전투기들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의 위상을 부각시킨다. 도처에서 벌어지는 축제와 군악대
행진은 당시의 미국에 '황금기(golden age)'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여성과 남성이 번갈아 가며 들려주는 내레이션은 결코 정적이거나 무미 건조하지 않다. 그들은 놀라움과 찬탄을 담은 목소리로 미국을
이야기 한다. 그런 내레이션과 함께 쓰인 다양한 음악들은 이 다큐에 즐거운 운율을 부여한다. 얼핏 보기엔 미국 관광청에서 만든
홍보 영상물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냉철한 프랑스인 관찰자는 부드러움 속에 뼈를 감추고 있다. 미국의 빛을 보여주고는, 이내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뒷골목도 살펴 본다. 교도소의 죄수들이 참가하는 로데오 경기에서 우승을 하는 이는 1년의 형기를 감면받는다.
죄수복을 입고 경기하는 그들을 보며 로데오 경기장을 찾은 많은 시민과 군인들은 열광한다. 폭주족과 스트리퍼들, 라스베가스의
도박장을 둘러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미국의 또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향락이 넘쳐난다.
다큐는 미국의 여러
다양한, 시시콜콜한 면면들까지 담아낸다. 개와 고양이들의 천국, 쌍둥이 축제, 아이들의 훌라후프 대회까지, 그걸 보고 있노라면
당시의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져만 간다. 도대체 저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끝없이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처럼 프랑스인 감독의 관찰기는 그렇게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확실히 특권을 의미합니다."
정말 그럴까? 자유분방하게 춤추고 노는 해변가의 젊은이들, 눈부신 캘리포니아 해변의 서퍼들, 온갖 놀이기구를 타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꿈의 나라 미국의 시민으로 사는 것은 꽤나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노는 장면이 자아내는 기묘한 파열음은 이
나라가 갖고 있는 인종 문제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백인 아이들은 잘 정돈된 공원 풀밭에서, 흑인 아이들은 구질구질한 빈민가
공터에서 지들끼리 논다. 경범죄를 저지른 젊은이들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머그샷을 찍고 있고, 정신없이 춤추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무도장처럼 보이는 곳은 교회이다.
마침내 이 프랑스인 관찰자는 마천루의 도시 뉴욕에 다다른다. 풍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자신의 탐방기가 20년 안에 닥칠 유럽의 변화를 예견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 다큐 속에 나온 것들은 상품과 군수 물자를 비롯해 미국이 유럽과 전 세계에 다양한 방식으로 수출한 하위
문화들의 집합체였다. 과연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던 나라와 사람들이 있었나?
그럼에도 라이헨바흐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어두운 심연을 주저없이 드러내 보인다. 어느 저수지에 줄지어 물에 잠긴 차들의 음산한 풍경은 결코 알 수 없는 미국의 숨겨진 일면을 드러낸다. 위험을 무릅쓴 자동차 묘기에서 차들은 뒤집혀지고 찌그러지기를 반복한다. 폐차장에 산처럼 쌓인 고물차들 사이로 허리가 굽은 노파는 유모차를 끌고 무언가를 찾는 것인지 헤매고 있다. 도금칠된 화려한 뉴욕의 빌딩 숲을 거니는 관광객들은 절대로 볼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그렇게,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프랑스인 감독은 관객들에게 1960년의 미국을 담아낸 만화경(萬華鏡)을 선사한다.
*사진 출처: aced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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