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술꾼들의 놀랍고도 오묘한 세계, Bloody Nose, Empty Pockets(2020)

 

  "난 내가 실패한 뒤에 알콜 중독자가 되지 않은 것이 자랑스러워. 왜냐하면 그건 정말 지루한 일이거든."

  남자의 이름은 마이클, 화면 너머로도 그에게서는 술 냄새가 풍기는 것 같다. 아침 10시 59분, 술집 출근 도장을 찍는 58살의 머리 허연 알콜 중독자에게 오늘은 어떤 하루가 펼쳐질까? Bill Ross IV와 Turner Ross, 두 형제들의 다큐 'Bloody Nose, Empty Pockets(2020)'는 라스베가스의 술집 'Roaring '20s'의 마지막 영업일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진정한 술꾼들의 다채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을 술 취하게 만드는 희한한 다큐. 그대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즐거울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아주 흥미있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술집의 터줏대감 같은 마이클을 시작으로 하나 둘씩 술꾼들이 모여든다. 서로를 잘 아는 그들은 정답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눈다. 수염을 기른 큰 체구의 바텐더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벽면의 TV들에서는 뉴스와 예능 프로그램, 헐리우드 고전 영화들이 쉴 새 없이 나온다. 때는 바야흐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직전, 다큐는 2016년에 만들어졌다. 트럼프가 나오는 화면을 보면서 술꾼 한 명은 예언자적 통찰을 보여준다.

  "내 장담하지. 저 인간이 대통령이 되면 탄핵이 되거나, 안그러면 암살을 당할 거야."

  손님들의 면면은 참으로 다양하다. 트랜스 젠더, 흑인 노숙자, 아인슈타인 머리를 한 백발의 남자, 60살 된 늙은 여자, 호주 출신 중년 남자, 음악가 등등... 다큐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무려 22명에 이른다. 그들은 모두 코가 깨질 때까지, 바의 마지막 영업을 기념하며 동이 트는 새벽까지 술을 마신다. 다큐 내내 넘쳐나는 술에 음악이 빠질 수 없다. 주크 박스에서는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 나오고, 손님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춤을 춘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온갖 개똥 철학이 쏟아지고, 올라오는 취기와 함께 외로움의 눈물도 흘린다. 불쾌한 말다툼도 생긴다. 그래도 심각하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렇게 술 냄새가 진동하는 'Bloody Nose, Empty Pockets'를 보는 관객들은 어느새 자신이 그 바의 손님이 되어있음을 깨닫는다. 냉장고에 맥주가 있다면 꺼내어서 들이키게 될 것이다.

  폐업하는 술집의 마지막 하루를 찍다니, 참 다큐 편하게 만드네, 라고 생각했었다. 이 다큐의 제작자들은 그저 바라볼 뿐이다. 감독의 개입을 최소로 하는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중간 중간 제작자의 각인이 들어간다. 챕터를 나누듯 시적인 소제목들이 붙어있고, 술집 바깥의 풍경들이 삽화처럼 제시된다. 러닝타임 1시간 38분 동안 관객들은 'Roaring '20s'의 구석진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술꾼들의 세상을 관조한다. 만약 동네에 저런 술집이 있다면 자주 가게 될 것 같은 친숙하고 편안한 공간, 그런 술집이 문을 닫는다면 많이 아쉽겠다 싶다. 아침에 첫 출근 도장을 찍었던 마이클이 마지막으로 술집 문을 나서면 다큐가 끝난다. 그런데...

  'Roaring '20s'는 라스베가스에 있는 술집이 아니라, 루이지애나 주의 테리타운에 위치한 곳으로 아직도 영업하고 있다. 다큐에 나왔던 술꾼들은 오디션을 보고 출연한 일반인들이었다. 단 한 명, 마이클은 진짜 배우였다. '아니, 대체 내가 뭘 본 거야?' 마치 뒤통수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건 다큐가 아니라 영화인가? 무려 10년 동안, 제작자인 로스 형제들의 머릿속에서는 독특한 다큐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술집과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열망은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의 다큐 제작으로 이어졌다.

  원하는 술집을 찾기 위해 곳곳의 바들을 전전했고, 서로 케미가 잘 맞는 술꾼들의 조합을 보여주기 위해 수백 명의 일반인들을 인터뷰했다(출처 mubi.com과의 인터뷰). 카메라가 돌아가고, 그렇게 모인 이들은 진짜 술을 마시며 자신들 그 자체를 연기했다. 물론 설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의 벽면 TV에서 나오는 헐리우드 고전 영화들과 뉴스 화면들은 제작자들의 의도대로 편집되어서 나온 화면들이었다. 그 영화들은 내 눈길을 끌었다. 거기에는 1952년작 필름 느와르 'The Narrow Margin'도 있었다. 원래 촬영 현장에서는 사운드 녹음 때문에 주크 박스를 틀지 않으려고 했으나, 술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노래 없는 술집은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이 외쳤고, 결국 다큐는 술과 노래의 향연으로 채워졌다. 등장 인물들이 직접 부르는 스파이스 걸스(Spice Girls)의 노래, 호주 민요 'Waltzing Matilda'에 맞춰 함께 추는 춤은 안온하고 정겨운 술집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하이브리드(hybrid) 다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제법 그럴듯한 놀라운 세계를 만들어 낸다. 과연 술꾼들의 내면 풍경과 그들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술집을 이토록 사실적으로 그려낸 어떤 영화나 다큐가 있었던가? 이것은 분명 이전에는 없었던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길이다.

  "난 아침해가 싫어."

  문 닫는 새벽의 바를 나온 세 명의 술꾼들은 시멘트 바닥에서 해장술을 들이킨다. 그 가운데 한 명의 여성이 밝아오는 아침을 못마땅해 하며 하는 그 말은 진정한 술꾼의 속내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Bloody Nose, Empty Pockets'는 다큐일까, 영화일까? 그런 질문에 그것이 중요하냐고 되묻는 제작자 로스 형제들은 이 작품이 '영화'라고 대답한다. 다큐이면서 극적 허구를 포함하고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실제 보다 더 가까이 진실에 접근한 것처럼 보인다. 관객들은 'Bloody Nose, Empty Pockets'에서 그 오묘하고도 기이한 마법을 목격한다.


*사진 출처: mubi.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