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광기를 견뎌낸 희망의 예술,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Kusama: Infinity, 2018)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어요. 그건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던지는 일입니다."

  아흔에 가까운 예술가가 매일 작업하는 스튜디오 근처에는 정신 병동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앓았던 정신 질환은 이 예술가를 자주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았다. 중년 이후로는 정신 병동에서 거주하면서 창작 작업을 해나갔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었다. 광기가 자신을 삼켜버리도록 만드는 대신에, 그것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를 창작의 주제로 삼았다. 그가 그리는 무한한 점과 끝없이 이어진 세계는 마침내 자신을 구원했고,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아마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검정색 점들이 촘촘히 박힌 커다란 노란 호박을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헤더 렌즈(Heather Lenz)의 2018년작 다큐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Kusama: Infinity)'는 일본 출신의 현대 미술 작가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담았다. 다큐는 작가 본인을 비롯해 미술사가와 큐레이터, 지인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의 생애 전반을 다루면서, 작품 세계의 변화 과정과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들여다 본다. 

  마츠모토 시의 부유한 종묘상의 딸로 태어난 쿠사마 야요이는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부모는 자식의 예술적 재능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여성 편력은 딸에게 남성에 대한 혐오를 심어주었고, 억압적인 모친은 늘 미술을 그만 둘 것을 종용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야심있는 여성 예술가에게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곳이었다. 27살, 마침내 쿠사마 야요이는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가기 전에 그때까지 그렸던 자신의 그림들을 모두 폐기했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 그림들 보다 반드시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겠다고...

  뉴욕에 정착한 초창기의 쿠사마 야요이를 기억하는 지인들은 그가 무척 '패기가 넘치는(aggressive)'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넘쳐나는 창작열로 그 시기에 많은 그림을 쏟아냈다. 그림 뿐만 아니라 도발적인 설치 예술 작품도 선보였다. 독창적이고 새로운 작품으로 뉴욕 예술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쿠사마 야요이의 아이디어를 동료 남성 작가들은 거리낌없이 베끼기도 했다. 쿠사마 야요이가 천으로 제작한 소파 작품을 보고 올덴버그(Claes Oldenburg)는 섬유를 창작 소재로 쓰기 시작했다. 앤디 워홀은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회에서 본 사진 작업을 곧바로 자신의 작품에 써먹었다.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어도 이 비주류의 외국 여성 예술가에게 현실은 버겁기 짝이 없었다.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 당시에 나는... 너무나도 가난했어요."

  그 시절을 회고하는 노예술가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린다. 백인 남성 작가들이 우대받는 1960년대의 미국 현대 미술계에서 쿠사마 야요이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무용인들과 함께 하는 행위 예술과 영상물 제작,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누드 퍼포먼스 시위까지 이 여성 예술가는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은 고국 일본과 자신의 집안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특히 반전 시위에 참가한 쿠사마 야요이의 나체 사진은 자국 내에게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돈이 많았던 쿠사마의 집안에서는 마츠모토 시내의 서점과 가판대에서 모조리 신문과 잡지를 사들여서 감추기까지 했다. 작가는 일본에서 골칫덩이에 수치스런 인물로 여겨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술가로서의 명성은 먼 곳에 있었고, 가난은 발목을 잡았다. 급기야 2층 창문에서 몸을 내던지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1973년, 결국 깊은 좌절감과 슬픔을 안고 일본으로 돌아온다. 중년의 예술가는 정신 병동을 집으로 삼았고, 그곳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0년 가까이 쿠사마 야요이는 현대 미술계에서 잊혀진 이름이 된다.

  1989년, 뉴욕 국제 현대 미술 센터(CICA)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회고전이 열렸다. 그것은 쿠사마 야요이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1993년의 베니스 비엔날레는 예술 경력의 새로운 분기점이 된다. 호박과 거울을 이용한 설치 예술 작품은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전시회들은 관람객으로 넘쳐났다. 특히 거울과 LED 조명을 사용한 설치 예술은 관람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작품의 일부분을 이룬다. 예술 작품과 감상자가 이렇게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들에는 작가 자신의 신념이 투영되어 있다.

  "예술이 나에게 삶을 열어주었던 것처럼, 내 작품에서 사람들이 희망을 찾길 바랍니다."

  그의 작품 세계를 특징짓는 무수한 점들, 그리고 그것으로 연결된 무한의 그물은 생존을 위해 찾아낸 희망의 도구이다. 광기를 견뎌내며,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을 표현해 내는 방법으로서 쏟아낸 점들은 빛의 세계를 이룬다. 그것은 그저 의미없는 반복과 단조로운 리듬이 아니라 삶에 대한 거대한 찬가와 맞닿아 있다.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무한히 이어진 점들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생의 감각을 발견한다. 다큐의 끝부분에서 노작가는 영원히 살고 싶다고 말한다. 예술가는 오직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생의 끝자락에 서있는 쿠사마 야요이에게 그것은 이미 성취된 꿈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사진 출처: icamiami.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