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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 시기 소련의 흔들리는 풍경,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Трактир на Пятницкой, The Tavern on Pyatnitskaya, 1978)


  10년 동안 경찰로 일했던 그는 서른 살에 퇴직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추리 소설을 써내기 시작했다. 구 소련의 추리 소설 작가 니콜라이 레오노프 (Nikolai Leonov)가 1977년에 출간한 소설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은 이듬해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Aleksandr Faintsimmer 감독의 이 독특한 탐정물은 1978년의 흥행작 가운데 하나였고, 5400만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련의 1920년대를 배경으로 복고적 세트, 다양한 이력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를 비롯해 차르 시대의 전직 관료와 귀족, 갱단과 거리의 소매치기가 나온다. 영화에서는 뭔가 느슨하면서도 혼란과 불안이 뒤엉킨 시대적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레이(Grey)'란 별명으로 불리는 갱단의 두목은 연이은 강도와 살인을 저지르며 모스크바 범죄수사국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수사국 신입 경관 파닌은 정보 수집을 위해 갱단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에 웨이터로 잠입한다. 한편, 그레이는 강도 현장에서 경찰과 맞닥뜨리자 조직에 첩자가 있다고 의심한다. '프랑스인'으로 불리는 갱단의 조력자, '집시'라는 별명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부하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레이는 소매치기 '파슈카 아메리카'에게 정보력을 동원해 첩자 색출에 협력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던 중에 신분이 드러날 위기에 처한 파닌을 구하려다 퇴직 경관이 목숨을 잃는다. 마침내 수사국은 갱단을 일망타진할 마지막 작전을 펼치는데...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권은 혁명에 저항하는 세력들과 치열한 적백 내전을 치룬다. 내전은 곧 진압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소련의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 상태였다. 레닌은 급격한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유예하는 결정을 내린다. 1921년, 신경제 정책(New Economic Policy, NEP)이 시행된다. NEP는 부분적으로 사유 재산을 인정하고, 외국 자본의 유치를 비롯해 자본주의 경제 정책을 도입했다. 그 결과 소련의 경제는 놀랄 정도로 회복된다. 농업을 비롯해 상업이 크게 성장했고, 상당한 부를 축적한 이른바 'NEPmen'이라는 신흥 계층까지 생길 정도였다.

  영화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은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레이의 갱단은 상점을 비롯해 부유한 이들의 저택을 턴다. 갱단이 훔친 값비싼 보석과 골동품들은 'NEPmen'의 소유였다. 영화 속에서 아주 흥미있는 장면이 있다. 술집에서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이들이 질펀한 술자리를 갖는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술집의 늙은 기타 연주자에게 연주를 하라며 돈을 내던진다. 돈 있는 자들이 득세하는 시절, 그런 모욕을 받는 그레민은 차르 시대의 귀족 출신이었다. 곧 갱단의 일원인 '집시'가 나서서 모욕을 되갚아 준다. '집시'라고 불리는 이 남자의 배경도 독특하다. 그는 현실에 불만을 가진 사람으로 혁명에 찬동하지 않는 아나키스트처럼 보인다. 범죄 행각으로 사회 체제에 저항하고 그것을 무너뜨리고 싶어한다.

  'NEP' 시기의 소련은 희망과 불안, 번영과 혼란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구 시대의 잔재들을 어쩔 수 없이 끌어안아야만 했다. 거기에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귀족과 관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사국의 책임자 클리모프는 갱단에 대한 수사 정보가 새어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는 부하 직원 자이체프를 의심하는데, 자이체프가 제정 러시아 시대의 관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술집 연주자로 전락한 귀족이 있는가 하면, 자이체프처럼 새로운 집권 세력에 협력해서 생존을 도모하는 이도 있었다. 뒷골목을 장악한 소매치기 '파슈카 아메리카'처럼 내전에 부모를 잃고 사회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청년도 나온다. 그가 활보하는 거리에는 전쟁 고아들이 넘쳐난다.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은 그런 'NEP' 시기의 생생하고 사실적인 묘사 뿐만 아니라, 추리물로서의 재미도 갖추고 있다. 과연 갱단 내부에서 수사국의 첩자로 활동하는 이가 누구인지 그레이와 함께 관객들은 끝까지 머리를 굴려야 한다.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필름 느와르로서의 면모도 보여준다. 선술집의 여주인 이리나는 팜므 파탈로 강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발산한다. 이리나는 그레이의 조력자로 장물을 처분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경찰 애인을 압박해 수사 정보를 빼내기도 한다. 이리나는 오직 사랑만을 바라는 술집 여가수 바르바라와는 달리 물질적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나온다.

  유예된 혁명 과업의 완수를 위해서 사회악은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했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갱단의 비참한 최후와 함께 새로운 소비에트의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한다. 소매치기의 삶을 살던 청년은 농촌 출신의 순박한 아가씨 알로냐와 함께 귀향 열차에 오른다. 과연 파슈카에게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NEP 시기 농업 생산량은 크게 증가했고, 그로 인해 농부들의 삶은 윤택해졌다. 그러나 농부들과 NEPmen의 좋은 시절은 1928년까지만 지속되었다. 스탈린의 집권과 함께 NEP는 폐기된다. 스탈린은 농촌을 집단 농장으로 개조시켰고, 소련을 공업 중심의 생산국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했다.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은 추리물의 틀 안에 그러한 변화를 맞이하기 직전의 느슨하게 흔들리는 소련 사회의 풍경을 담아냈다.    


*사진 출처: vokrug.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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