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타임 95분의 영화가 30분으로 느껴지는 마법, 이것은 1950년대와 60년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Grace Chang의 영화
'맘보 걸(Mambo Girl, 1957)을 볼 때 일어났다. 영화는 시작부터 흥겨운 맘보 음악과 춤으로 시작한다. 체크 무늬의
날렵한 바지를 입은 여성이 놀라운 춤과 노래 실력을 뽐낸다. 무려 7분에 달하는 도입부의 장면은 이 여배우가 영화의 진정한
주인임을 알려준다. 중국의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어렸을 적부터 재능이 출중했던 그레이스는 1949년, 가족의 홍콩 이주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싱가포르를 기반으로 한 MP & GI 영화사는 극장 체인을 비롯해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영화 산업을 확장해
나갔다. 홍콩에 세운 자회사에서는 광둥어가 아닌 만다린(Mandarin, 표준 중국어)으로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레이스는 그
영화들의 주역을 도맡았다. '맘보 걸'은 그레이스가 24살이 되었을 때 찍은 작품으로 큰 흥행 성적을 거두며, 이 여배우의 독보적
스타 파워를 입증하는 계기가 된다.
학교의 퀸, 그리고 '맘보 걸'이라는 사랑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는 카이링은 남부러울 것이 없다. 번화가에서 커다란 인형 가게를
하는 부모와 귀여운 여동생, 그리고 카이링을 떠받드는 친구들과 부유하고 멋진 남자 친구까지 있다. 카이링의 20살 생일을 앞두고
남자 친구 다니안은 성대한 생일 파티를 계획한다. 한편 카이링의 집에서는 부모가 카이링의 정확한 생일 날짜를 두고 옥신각신한다.
출생증명서를 꺼내보며 확인하는데, 마침 카이링의 여동생이 그 서류를 보게 된다. 카이링은 입양된 딸이었던 것. 나중에 친딸을
얻었지만 부부는 카이링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키웠다. 그 사실을 알고 고민하던 여동생은 카이링을 시기하는 친구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출생의 비밀은 카이링에게 가출을 감행하게 만든다. 친모를 찾아나선 카이링, 사랑스런 맘보 걸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남자 친구가 열어준 생일 파티에서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카이링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날 밤, 집의 옥상에 올라가서
도시의 밤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허공에서 환영(幻影)을 목격한다. 나이들고 가난한 전통복식 차림의 여성은 오래전 헤어진
딸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른다. 카이링은 그 환영이 자신의 친어머니라고 생각하며, 어머니를 찾기로 결심한다. 이 장면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햄릿' 1막을 연상케 한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햄릿의 부왕은 유령으로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카이링의
친모를 찾기 위한 여정은 결국 번화한 나이트클럽 거리에서 끝난다. 카이링은 자신의 모친이 클럽의 여가수일 것으로 짐작하지만, 늙은
종업원의 안내로 만나게 된 여성은 클럽 파우더룸에서 손님의 물건을 관리하는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은 자신에게는
딸이 없다며, 카이링의 추측을 끝끝내 부인한다. 그러면서도 카이링의 양부모와 집안에 대해 이것저것을 묻는다.
'스텔라 달라스(Stella DallasStella Dallas, 1937)'의 바바라 스탠윅처럼 카이링의 친모는 딸의 행복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실망한 카이링은 집으로 돌아가고, 카이링은 자신을 기다리던 이들과 함께 한바탕 기쁨의 춤판(!)을 벌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기이한 뮤지컬에는 진정한 슬픔과 고통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도 쉽게 친엄마 찾기를 포기한
카이링은 양부모의 안온한 집과 자신의 친구들에게서 다시금 행복을 되찾는다. 그런데 그 장면을 카이링의 친모는 집앞의 열려진
문틈으로 엿본다. 함께 온 클럽의 노종업원은 딸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여자는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영화 '첨밀밀(甜蜜蜜, 1997)'이 홍콩 반환을 앞둔 홍콩인들의 내면에 대한 은유이듯, '맘보 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당시
홍콩의 지위를 떠올리게 만든다. 열려진 문 앞에서 서성이던 친모(중국)는 양부모(영국)의 품에 안착하는 입양딸 카이링(홍콩)을
보며 마지못해 떠난다. 이 여성은 자신의 권리를 영구적으로 포기한 것이 아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떠난 친모는 언젠가
열려진 문 안으로 들어와 딸을 찾아갈 것임을 관객들은 짐작하게 된다.
영화 '맘보 걸'이 맛뵈기였다면, 그레이스 장의 본격적 공연은 1960년에 제작된 'The Wild, Wild Rose'에서
펼쳐진다.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Carmen)'의 '홍콩 나이트클럽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레이스가 가진
재능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경음악풍의 노래로 번안된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그레이스의 놀라운 창법은 그야말로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든다. 도입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오페라 '카르멘'의 '하바네라',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여자의 마음',
레하르의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의 '입술은 침묵하고'와 같은 노래가 이어지며, 후반부에는 기모노를 입고 부르는 푸치니 오페라
'나비 부인'의 '어떤 갠 날'이 나온다. 그레이스는 오페라 아리아를 비롯해 재즈곡도 부르며, 플라멩코 춤 공연도 해낸다. 이
여배우에게는 소화하지 못할 그 어떤 음악 장르, 춤의 종류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무려 2시간 1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느껴진다.
서구 오페라의 장르적, 문화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 'The Wild, Wild Rose'는 분명히 비극임에도 영화가 온전히 한
편의 공연물로 기능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 중심에는 '그레이스 장'이라는 배우이면서 가수, 무용가인 종합 예술인이 자리한다.
당시의 홍콩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관객들은 스크린을 통해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여성 예능인의 공연을 관람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홍콩 영화의 독특한 성취를 보여주는 일련의 뮤지컬 영화들의 인기는 영화와 함께 했던 여배우들의 은퇴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홍콩 영화사의 한 장이 닫힌다. 새로운 장을 연 것은 소씨 형제들(邵氏兄弟), 쇼 브라더스(Shaw
Brothers Production)가 만드는 무협물들이었다.
*사진 출처: no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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