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내 그림은 왜 훔쳤어요?"
"그러니까, 그건... 그림이 아름다워서요."
화가는 전시를 위해 화랑에 걸어 두었던 그림 2점을 도둑맞았다. 감시 카메라에 찍힌 두 명의 강도는 곧 경찰에 붙잡혔다.
재판정에서 자신의 그림을 훔친 도둑과 마주친 화가는 그림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벤자민 리 감독의 2020년작 다큐
'화가와 도둑(The Painter and the Thief)'은 그림을 두고 생겨난 화가와 도둑 사이의 기이한 유대를 담는다.
Photorealism (사진을 바탕으로 다양한 매체적 이미지로 재현하는 예술) 화가 바르보라와 그의 그림을 훔친 도둑 칼의
이야기가 3년에 걸친 시간 동안 펼쳐진다.
도둑의 몸에는 눈에 띄는 많은 문신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약 중독자로 이미 전과가 있는 이 남자는 신진 작가의 그림을 훔쳤다.
화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신의 그림을 왜 훔쳤는지 궁금해 한다. 그림이 아름다워서 그랬다는 답이 바르보라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자는 화가의 요청대로 모델이 되었고,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친구처럼 인간적으로도 가까워진다. 과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칼을 범죄자로 인식하는 관객들이 화가에게 생길 수 있는 안좋은 일에 대해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대담한
화가는 칼을 처음 본 순간부터 범죄자가 아닌 상처받은 인간으로 보았다. 바르보라가 그린 칼의 초상화는 그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준다. 그림을 보고 그가 흘린 눈물은 거짓처럼 보이지 않는다. 화가와 도둑의 예기치 않았던 예술적 협업 관계는 그런 신뢰 속에
지속된다.
관객들은 전반부에는 화가 바르보라의 시점으로, 후반부에는 도둑 칼의 시점에서 그 관계의 전모를 탐색할 수 있다. 칼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바르보라는 그의 불우했던 인생에 대해 알게 된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부모의 이혼, 외로웠던 성장기와 그로 인해 겪은
정서적인 문제, 그 모든 것이 칼의 현재를 만들어 냈다. 화가는 모델의 고통에 깊이 감정이입을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침묵하는
훔친 그림의 행방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는다. 그는 당시에 약물 중독 상태여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다.
"바르보라가 나를 보는 것처럼, 나도 바르보라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종종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도둑인 칼은 자신이 바라본 화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이 화가와 그림에 꽤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르보라에게는
고통스런 과거가 있었다. 전 남자 친구의 폭력에 시달렸던 체코 출신의 화가는 현재의 노르웨이인 남자 친구를 만나고 나서야 회복의
여정에 들어설 수 있었다. 칼은 바르보라의 그림에 내재된 죽음과 고통의 의미에 공감했다. 화가와 도둑은 각자가 가진 인생의 상처를
그림을 통해 들여다 보았던 것이다.
이 독특한 인간적 유대는 결코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칼은 마약 중독의 악순환에 다시 빠지고, 치명적인 차사고를 겪는다.
바르보라는 칼과 자신의 미술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과 문제가 생긴다. 과연 바르보라가 칼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가는
남자 친구와 함께 한 커플 심리 치료 session에서 타인의 고통을 응시하면서 그것을 그림의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 착취적(exploitative)인 면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르보라와 칼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격려하면서 친구로서의 우정을 쌓아가는 것 같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보여주지 않은, 또는 보려고 하지
않은 내면의 모습이 있다. 칼은 공예학교에서 목공을 전공했고, 뛰어난 운동 선수이기도 했다. 그는 바르보라가 그런 사실 보다는
자신에게 관심있는 어두운 고통만을 보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다큐는 둘 사이에 생긴 인간적 유대에 군데군데 비어있는 틈과
뒤틀린 부분을 보여준다.
벤자민 리 감독은 '화가와 도둑'을 마치 추리 소설을 읽듯 영화적 내러티브를 도입해서 흥미와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진행되는
사건의 현재 시점에서 돌아가 과거를 들여다 보게 하는 비선형적 시간 구조는 다큐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또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1950)'처럼 각자의 관점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관계의 숨겨진 면모를 바라보게 한다. 바르보라가 칼이
말해주지 않은 그림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결국 한 점을 찾아내는 과정은 스릴러물 같은 짜릿함을 선사한다.
거기에 칼이 수감된 노르웨이 감옥의 현실은 관객의 놀라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마치 호텔방 같은 1인실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체력 단련실에서 운동을 하고 상주 심리 치료사의 도움을 받는 칼은 출소할 즈음에는 '밖이 두렵다(!)'고 말한다. 범죄자에게
충분한 재활의 기회를 주고 사회적 안착을 적극적으로 돕는 나라. 어떤 면에서 이 다큐가 보여주는 기이한 우정의 연대기는
'노르웨이'라는 나라의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뜻밖의 결론에 다다른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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