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인 감독 앤드류 안(Andrew Ahn)의 장편 데뷔작 'Spa Night(2016)'를 보는 동안 떠올렸던 영화는
스티븐 프리어스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My Beautiful Laundrette, 1985)'였다.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동성애자가 주인공이다. 한국인 이민자 2세인 앤드류 안은 첫 영화로 자신의 출신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의 대사는 대부분 한국어이며,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주제의
이야기이고, 정서적으로도 잘 와닿는다. 하지만 그러한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서양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그저
그런 퀴어 영화(Queer film)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좀 뻔한, 진부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낯선 땅에
정착하는 이민 1세대의 고군분투,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2세대, 거기에 동성애가 버무려진 'Spa Night'는 그럼에도 감독의
놀라운 연출력, 내러티브의 핍진성이 돋보인다.
창작자에게 가장 편하고, 다루기 쉬운 소재는 무엇일까? 바로 자기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이다.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세하고 치밀하게 쓸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들은 관객들과 만나 공명을 이루어낸다.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동성애자인 앤드류 안은 첫 영화로 그것을 성취한다. 'Spa Night'는 도입부를 목욕탕에서 시작한다. 사우나실에 있는 아버지는
열기를 힘들어하는 아들에게 더 있으라고 말한다. 파랑색 이태리 타올로 아버지와 아들은 때를 민다. 목욕을 끝낸 후 휴게실에서
팥빙수를 같이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 가족에게 한국식 목욕탕은 화합과 소통의 장소이다. 부모는 아들에게 한국인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비춘다. 그러나 아들 데이비드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 완곡히 부인한다.
매일 조깅을 하며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18살의 데이비드는 자신의 몸에 대한 관심이 많다. 셀카로 몸을 찍어보며 수시로 변화를
체크한다. 이 청년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데이비드의 내면에서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떤
것에 대한 자각의 감정이 올라온다. 그것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몸'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다. 돈 문제로 갑자기 문을 닫게 된
식당, 부모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 경제적인 곤궁은 데이비드에게도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한다.
대학에 진학하길 바라는 부모는 무리를 해가며 아들을 입시 학원에 등록을 시키지만, 공부에 뜻이 없는데다 부모의 곤경을 보기 힘든
효자 아들은 목욕탕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모호한 감정의 실체와 마주한다.
열기와 습기가 어우러진 사우나 안의 뿌연 거울 앞에 선 데이비드의 모습은 흐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게이들의 공공연한 만남의
장소인 그곳 목욕탕은 데이비드에게 혐오와 고통, 강렬한 호기심의 장소가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를 잘
알지만, 청년은 자신이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어서 대학에 갈 생각이 없고, 부모가 원하는
며느리를 맞이할 수도 없다. 미국 땅에서 유색인종, 거기에 성적 소수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약자로 더 복잡하고 불편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18살의 청년에게 그 어떤 것도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Spa Night'는 데이비드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자각하는 부분에서 멈춘다. 데이비드에게 그것이 새로운 삶을 위한 출발 지점인 것처럼, 이 영화도 앤드류 안의 영화적인 첫
목소리인 셈이다.
2019년작인 'Driveways'는 'Spa Night'의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확장되어서 펼쳐진다. 싱글맘 캐시는 아들
코디와 함께 뉴욕 교외에 위치한 언니의 집을 찾는다. 언니 에이프릴이 세상을 뜨자 남겨진 집을 처분하기 위해 온 것이다. 거의
왕래가 없었던 12살 차이의 언니의 집 안을 본 캐시는 놀라고 만다. 캐시의 언니는 온갖 잡동사니와 쓰레기들로 집을 채운
호더(hoarder, 비정상적으로 물건을 수집하고 쌓아놓고 사는 사람)였다. 집을 팔기 위해서는 그 물건들을 치워야 하는 상황,
캐시는 게임기만을 끼고 사는 8살 아들과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머물게 된다. 옆집에 사는 한국전 참전 군인 델은 그들
모자(母子)와 소박한 유대를 쌓아가고, 특히 내성적인 코디는 델과의 만남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백인 배우들을 기용하려던 원래의 계획을 앤드루 안은 아시안계 배우로 바꾸었다. 베트남계 미국인 배우 홍 차우(Hong
Chau)는 싱글맘으로 자신의 삶과 양육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애쓰는 캐시를 잘 보여준다. 아들 코디 역의 루카스 제이(Lucas
Jaye)의 명징하고 직관적인 연기는 그 자체로 빛난다. 앤드루 안에게 아시안으로 미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 아시안 배우들을 쓰기로 한 것이다. 'Driveways'는 그렇다고 해서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캐시의 부산스러운 백인 이웃 린다와 그 손자들이 microagression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 관계와
소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다.
세상에 그저 둘 밖에 없는 것 같은 외로운 엄마와 아들은 낯선 곳에서 인생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캐시가 언니의 집을 치우면서
잘 알지 못했던 언니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 보게되는 것, 게임기와 일본 만화에만 관심을 갖던 코디가 말년의 퇴역군인 델과 우정을
쌓아가는 것, 그 과정들은 절제되어 있으면서 따뜻한 감정의 물결이 소용돌이친다. 'Spa Night'에서 개인적 정체성의 탐구를
보여주었던 감독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Driveways'는 인종과 세대를 뛰어넘는 관계의 보편성, 그것이 갖는 삶의
의미를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늘 혼자 식사하고 잠드는, 퇴역 군인 회관에 가끔 들러 빙고 게임을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노인은 8살 꼬마와 친구가 된다. 그 우정은 살아갈 날이 얼마남지 않은 그에게도,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코디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코디는 더이상 게임기가 아니라 동네의 흑인 남매와 같이 길에서 즐겁게
논다.
첫 장편 영화 'Spa Night'로 선댄스에서 수상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화려하게 알렸지만, 영화는 한국계 이민자 가정이라는
배경적 묘사 때문에 그다지 큰 공감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후속작 'Driveways'는 매우 소박한 영화임에도 인간
관계라는 보편적 주제를 자신만의 독자적 연출로 풀어냄으로써 평단과 관객들의 호평을 끌어내었다. 개인적으로는 뭔가 심심하게 느껴지는
'Driveways'보다 'Spa Night'가 더 집중력있고 나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양 관객들에게는
'Driveways'가 꽤 밀도있게 다가갔던 모양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받고 울었다는 리뷰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퇴역 군인 델 역을 맡았던 Brian Dennehy의 유작으로서 가지는 나름의 의미도 더해졌을 것이다. 앤드류 안의 두 영화는
자아 탐구에서 시작된 영화적 여정이 세상과 타자로 조금씩 넓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세 번째 영화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해진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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