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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의 틀에서 재현된 인간 관계의 본질, Asako I & II(寝ても覚めても, 2018)

 

 *이 글은 영화 '아사코(寝ても覚めても, 2018)'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심드렁하게 보고 나서,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궁금해졌다. 이건 걸작이니 꼭 보아야 한다고 말한 외국의 평론가가 있었다. 르 몽드(Le Monde)에 영화 비평을 쓰는 자끄 만델바움이었다. 정말 내가 이 사람과 같은 영화를 본 것이 맞을까?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말해야 '영잘알'이 되는 기이한 현실에 대해서 말이다.

  오사카에 사는 아사코는 사진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난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불 같았던 사랑의 감정은 갑작스런 바쿠의 잠적으로 상처 속에 봉인된다. 2년 뒤, 아사코는 도쿄에서 바쿠와 똑같이 생긴 외모의 회사원 료헤이를 보게 된다. 료헤이가 바쿠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사코는 료헤이와의 관계를 이어간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흐르고,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청혼한다. 그런데 아사코는 예전의 지인 하루요를 만나 바쿠의 소식을 듣는다. 유명 모델이 된 바쿠, 아사코는 감정의 혼란을 느끼고 그런 아사코에게 바쿠가 찾아오는데...

  바쿠와 처음 만나게 된 사진 전시회에는 일본의 사진 작가 고초 시게오(牛腸茂雄)의 'Self and Others'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에 앓은 병으로 신체 기형의 후유증을 갖게 된 이 사진 작가는 타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했다. 그 결과물이 1977년에 나온 사진집 'Self and Others'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사토 마코토는 2001년에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다큐를 동명의 제목으로 만들었다. 이미지의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 다큐를 보고 나면 영화 '아사코'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그 사진집에는 아이들을 비롯해 평범한 사람들의 초상 사진이 실려 있다. 고초 시게오의 작업은 마치 다이앤 아버스와 로버트 프랭크의 시적인 결합처럼 느껴진다. 그의 사진들은 개인이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어떻게 규정되고 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다.

  두 명의 어린 소녀들의 사진은 영화의 제목 'Asako I & II'와 겹친다. 관객은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1인 2역으로 연기하는 바쿠와 료헤이를 서로 다른 인물로 상정한다. 그것처럼 그 두 사람을 사랑하는 아사코는 분리된 정체성을 가진 걸까? 바쿠와의 첫키스가 이루어진 길거리에서 어린 학생들은 부주의하게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 불꽃 튀는 사랑의 감정, 서로 하나임을 느끼는 희열은 마치 꿈 속 장면처럼 제시된다. 둘은 오토바이를 타고가다가 사고가 나는데, 그 어떤 상처를 입지도 않고 살아남는다. 그 사랑은 임사체험(臨死體驗)처럼 격렬하고 비현실적이다.

  바쿠(ばく)라는 이름이 가진 곡물 '보리'와 동물 '맥(獏)'이라는 이중적 의미 가운데, 일본의 전통 요괴를 지칭하기도 하는 '맥'이라는 단어가 흥미롭다. 중국의 전통 설화에서 유래된 이 괴물은 일본에서 꿈, 특히 악몽을 먹어버리는 요괴가 되었다. 영화 속 바쿠는 그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이미지를 차용한다. 그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처럼 보인다. 잘 생기고 자신감이 넘쳐 흐르지만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없는 제멋대로인 남자, 그러므로 아사코의 지인들은 바쿠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바쿠가 다시 아사코를 찾아왔을 때, 아사코는 두려움에 떨며 어쩔 줄을 모른다. 그 장면에서 흐르는 불길한 음악은 너무 직설적이라 무슨 스릴러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사코는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료헤이에게 정착하기로 결정했지만, 그 결정이 바쿠의 등장으로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과거의, 꿈 속의 연인 바쿠에게 아사코는 결국 달려간다. 모든 것을 버리고 바쿠의 차를 타고 떠나지만, 아사코는 자신의 내면적 감정이 료헤이에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가는 도중에 멈춘다. 바닷가 방파제에서 아사코는 바쿠와 헤어진다. 이 장면이 무척 흥미로운데, 영화는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돌아가는 장면을 아주 꼼꼼하게 보여준다. 데려다 주겠다는 바쿠의 제안을 거절하고, 아사코는 근처의 지인에게 돈을 빌려서 표를 끊고,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 여느 다른 영화라면 이런 부분은 생략되지만,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 과정을 그대로 펼쳐놓는다. 아사코는 방파제를 달리고, 골목을 탐색하며, 자신의 힘으로 이동한다.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이 여자 주인공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만 다시 현실로 진입할 수 있다.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바쿠의 기억에 매여있는 아사코의 모습은 연극 배우 친구 마야가 연기한 체호프의 희곡 '세 자매'와 겹쳐진다. 장군인 아버지의 죽음 이후 몰락한 집안의 세 자매는 어떻게든 시골에서 벗어나 모스크바로 가기를 꿈꾼다. 그들에게 모스크바는 꿈의 도시이며 희망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현실은 냉엄하며, 모스크바는 그저 먼 곳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이 희곡의 대사에서 '모스크바'는 여러 번 나온다. 아사코에게 '바쿠'는 세 자매가 갈 수 없는 '모스크바'와도 같다. 꿈과 현실, 그 사이에서 두 명의 아사코는 서로 갈등하고 대결한다.

  자, 꿈 속에서나 볼 것 같은 너무나 멋진 '나쁜' 남자와 수수하고 평범하지만 현실의 '착한' 남자, 그 둘 사이에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아사코는 과거의 연인과 떠나면서 료헤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지만, 결국 돌아온다. 료헤이가 받아줄까? 잘못을 저지른 여자는 속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죄의식을 짊어진 채, 그저 함께 살아가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관객은 아사코의 친구 마야가 공연하기로 했던 연극을 떠올려야만 한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의 '들오리', 료헤이는 그 연극을 보러 갔다가 지진을 경험한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료헤이는 아사코와 재회하고 둘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들오리'는 어떤 작품인가?

  성공한 사업가 베를렌, 그에게는 아들 그레거스가 있다. 부도덕하고 비열한 아버지를 경멸하는 그레거스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늙은 부친은 재혼을 앞두고, 아들에게 사업을 이으라고 권유하지만 그레거스는 거절한다. 아버지 베를렌은 젊은 시절, 엑달과 벌목 사업을 하다가 범법 행위를 저질렀는데 그 죄를 엑달에게 뒤집어 씌웠다. 교도소에 다녀온 이후, 엑달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것은 그의 아들 얄마르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사진사로 일하는 얄마르는 새로운 사진술로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길 꿈꾼다. 그런 그에게 친구 그레거스의 등장은 예기치 못한 풍파를 일으킨다. 얄마르는 부인 지나와의 사이에 딸 헤드비를 두고 있는데, 이 착하고 순수한 딸은 그의 기쁨이다. 그런데 그레거스는 지나가 자신의 아버지 베를렌의 정부였으며, 헤드비가 그 둘의 딸임을 알려준다. 충격을 받은 얄마르는 부인과 딸을 증오하게 되고, 헤드비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5막으로 이루어진 이 긴 비극은 일상적 행복 뒤에 가려진 위선과 죄를 다룬다. 그레거스는 엑달과 얄마르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에 진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의 그런 결정은 행복하게 살아가던 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한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현재의 삶은 산산조각이 난다. 료헤이에게 돌아간 아사코가 용서를 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입센의 '들오리'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새로 이사한 집 앞의 불어난 강물이 '더럽다'고 말하는 료헤이, 아사코는 거기에 '그렇지만 아름답다'고 덧붙여 말한다. 료헤이의 신뢰를 깨뜨렸으면서도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은 과연 위선일까? 그러나 흙탕물이 흐르는 강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아사코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죄의식 위에서도 두 사람이 새로운 관계를 쌓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행복은 한 점 티끌없는 무류성(無謬性)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과거의 조각들을 끌어안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로맨스'라는 틀을 빌어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관계를 형성해가는 인간의 본질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아사코'가 대단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기존의 문학과 사진 예술을 차용한 부분이 흥미롭기는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코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으며, 그렇게 깊이있는 울림을 주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러닝타임이 5시간이 넘는 이 감독의 'Happy Hour(2016)'를 한 번 볼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사진 출처: fandango.com  



**여주인공 아사코 역의 카라타 에리카는 영화에서 오사카 출신의 아사코를 간사이 사투리로 연기한다. 그런데 치바현 출신의 이 배우의 사투리 연기는 너무나 어색하게 들린다. 좀 더 치열하게 사투리 연습을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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