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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타케시가 만들어낸 잔잔한 감동의 파고,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A Scene at the Sea, 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1991)

 

* 이 글은 영화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선생의 인터뷰를 국악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다. 어떻게 가야금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화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6ㆍ25 동란이 터지고 부산에서 잠시 보냈던 피난 시절, 중학생이었던 선생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어느 집의 처마밑에 서있었다. 그런데 그 집에서 들리는 가야금 소리가 선생의 마음을 가만히 사로잡았다. 그것이 그가 평생을 두고 함께 할 가야금과의 시작이었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의 청각 장애인 청년 시게루는 쓰레기 수거업체에서 일한다. 어느 날, 해변가의 쓰레기를 치우던 그는 부서져서 버려진 서핑 보드를 발견한다. 그렇게 시게루는 서핑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타노 타케시 감독의 1991년작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닷가(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 는 농아 청년 시게루와 연인 타카코의 잊지 못할 여름날의 이야기를 담는다.

  주워온 서핑 보드를 시게루는 정성껏 수리한다. 스티로폼과 스카치테이프로 이어붙인 보드를 들고 무작정 바다로 가서 매일 연습을 하는 시게루. 그의 곁에는 언제는 여자 친구가 함께 한다. 둘 다 농아인 이 커플은 말 대신에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타카코는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시게루의 옷을 개켜놓고, 연인이 있는 바다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같은 해변가의 서핑 클럽 회원들의 눈에 시게루는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테이프로 칭칭 감은 변변찮은 보드에 서핑복도 없이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시게루를 그들은 비웃고 한심하게 바라본다. 

  '소나티네(1993)', '하나비(1997)'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기타노 타케시 감독은 폭력과 유혈이 난무하는 어둠의 미학을 보여준다. '기쿠지로의 여름(1999)'은 그의 영화들 가운데 좀 이례적이다. 전직 야쿠자와 이웃집 소년의 한바탕 유쾌한 이 로드 무비는 마치 중간의 쉼표 같은 느낌이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또한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 영화는 보다 묵직한 감정의 울림을 전달한다. 대사는 매우 절제되어 있고, 끊임없이 들이치는 파도 소리와 푸른 바다, 농아 연인의 감정의 울림이 영화를 채운다. 관객들은 원시적이고 순수한 무성 영화적 감성을 만난다.

  결국 거센 파도에 다시 부서지고 만 서핑 보드, 시게루는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새 보드를 산다. 타카코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를 타려는데, 기사는 보드를 들고 탈 수 없다고 제지한다. 시게루는 하는 수 없이 집까지 걸어가고, 타카코는 버스를 탄다. 타카코와 좀 더 빨리 만나기 위해 시게루는 무거운 서핑 보드를 들고, 뛰고 걷기를 반복한다. 타카코는 거의 모두가 내린 빈 버스 안에서도 자리에 앉지 않고 내내 서서 온다. 힘들게 걸어올 남자 친구를 생각하면 그냥 편하게 앉을 수가 없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어둑해진 거리의 정류장에서 만났을 때, 그들이 느끼는 재회의 기쁨은 화면에 넘실거린다. 이렇게 두 연인은 말하지 않아도 눈짓과 손짓, 마음으로 소통한다.

  그러나 영화는 시게루와 타카코가 보여주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만을 비춰주지 않는다. 기타노 타케시는 자신의 영화적 각인을 분명히 새겨넣는다. 장애인이며 주변인의 삶을 사는 시게루에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는다. 그를 매혹시키는 서핑과는 달리 쓰레기 수거일은 지루하고 힘든 일이며, 그를 대하는 주변의 시선은 냉소와 멸시가 섞여있다. 두 명의 동네 녀석들은 시게루를 귀머거리라고 부르며, 그에게 돌을 던져 도발하기도 한다. 서핑 가게 주인의 권유로 처음으로 대회에 나가게 되었지만, 듣지 못하는 그에게 함께 나간 클럽 회원들은 출전 순서를 알려주지도 않는다. 시게루는 대회가 끝난 텅 빈 바닷가에서 혼자 서핑을 하고 온다. 서핑에 정신이 팔려 일도 빼먹는 그에게 나이든 동료는 정신차리라며 손찌검을 하려고 든다. 그는 서핑복에 맨발 차림의 시게루를 억지로 끌고 가서 일을 시킨다.

  비록 파도 소리는 듣지 못하지만 그저 좋은 바다와 타카코가 있는 시게루의 닫힌 내면 세계. 서핑은 청년을 조금씩 바깥 세상과 소통하게 만든다. 그의 노력과 열정에 클럽 회원들의 비웃음은 감탄으로 바뀐다. 두 번째로 나간 대회에서는 입상의 기쁨도 누린다. 그렇게 언제나 서핑과 함께 하며 행복할 것 같았던 청년은 비오는 날의 바닷가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기타노 타케시는 해변으로 홀로 되돌아온 서핑 보드로 시게루의 마지막을 알린다. 이 영화의 일본 개봉 당시 홍보 문구는 이랬다. '일생에 한 번, 이런 여름이 온다' 그 한 번 뿐인 여름의 바다 속으로 시게루는 떠나버렸다.

  그저 말 할 수 없는 청년과 바다를 담았을 뿐인데도 영화는 굽이치는 감정의 파고를 만들어 낸다. 거기에는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히사이시 조의 반짝거리는 재능도 함께 한다. 영화 음악이 어떻게 영화 그 자체가 되는지 관객들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서 확인하게 된다. 허무와 폭력, 피와 고통이 흘러 넘치는 기타노 타케시의 영화 세계에 이런 영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는 영화가 줄 수 있는 근원적인 감정에 접근한다. 이 영화가 주는 평온하고도 잔잔한 감동 속에는 서늘한 슬픔이 자리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속에서 시게루를 웃음짓게 하고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파도처럼 보는 이의 마음에 들이친다.


*사진 출처: pennypost.or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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