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들어!'하는 대사와 함께 카우보이 복장의 남자가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겁에 질린 집주인 남자와 침입자 사이의
총질이 시작된다. '소련 웨스턴(Red Western)'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 무렵에 남자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인사를
나눈다. 잠시 후 나오는 오프닝 크레딧을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소련의 여성 영화 감독 라리사 세피트코(Larisa
Shepitko)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신과 나(You and Me, 1971)', 도입부 장면부터 범상치 않은 영화는
러닝타임 97분 내내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으며,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감독의
의중에 조금 다가설 수 있다. 관객을 내러티브 바깥으로 밀쳐내는 영화, 세피트코는 동시대에도 그랬고 후대의 관객들과도 불화할 것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를 갖고 있는 이 영화는 주인공 표토르의 과거 기억이 플래시백으로 중간 중간 제시된다. 의사인 표토르는 친구
샤샤와 의학 연구소에서 뇌종양 연구를 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표토르는 연구를 그만 두고 스웨덴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일한다. 샤샤 또한 정부 기관의 관리직으로 안정된 위치에 오른다. 표토르는 어느 날 갑자기 스웨덴에서 귀국해서 다시 이전의 연구를
이어가려 한다. 샤샤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하지만 샤샤는 거절한다. 실망한 표토르는 연락도 없이 사라지고, 그러는 동안 표토르의
아내 카티야는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샤샤와 가까워진다. 시베리아의 시골 마을 의사가 된 표토르, 친구의 아내에게 마음을 빼앗긴
샤샤, 자신과 아이를 두고 잠적한 남편을 이해할 수 없는 카티야, 이 세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1950년대에 러시아 국립 영화학교(VGIK)에서 구세대 감독들에게 영화를 배웠던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이 있었다. 바실리 슉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라리사 세피트코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이들은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소련 영화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배우이며 작가이기도 했던 슉신은 고향 알타이의 정서를 소련 민중의 삶 속에 녹여내었고, 타르코프스키는 독자적인 영상
미학을 확립했다. 세피트코 또한 이야기 중심의 영화가 아닌, 이미지가 가진 힘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1971년작 '당신과
나'는 그것을 잘 드러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표토르의 직업은 의사인데, 영화는 표토르의 직업과 과거에 대한 정보를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오직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화면과 나중에 시골 마을 의사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주인공에 대해 알게 된다. 표토르가 왜 연구를 그만 두고 외국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다. 다만 표토르와 샤샤 사이에 있었던 카티야의 존재가 어느 정도 그 결정에 영향을 끼쳤음을 추측할
수 있다. 카티야는 갑작스런 남편의 귀국과 잠적에 실망하고 분노한다. 표토르의 내면에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은 무작정 길을 떠나게
만든다. 모스크바에서 떠나는 기차를 타기 위해 달려가는 표토르를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거칠게 따라간다. 마구 흔들리는 쇼트는
표토르의 불안정한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후 이어지는 여행에서 남자는 가난하고 소박한 민중들과 만난다. 귀향하는 젊은 농부
가족, 사과 한 알을 건네는 중년의 시골 아낙네, 그들과의 만남 끝에는 연인 때문에 자살 시도를 하는 철부지 아가씨도 있다. 결국
표토르는 시골 의사로 정착한다.
세피트코는 이 영화에서 이야기 보다는 이미지를 우선으로 한다. 먼지 낀 구두 위에 십자가를 그리던 표토르의 시선이 창공을
응시하자, 그것은 붉은 십자가 마크가 그려진 구급 헬기로 바뀐다. 헬기를 타고 가던 표토르는 한창 댐 공사 중이던 인부들을 보게
된다. 인부들은 손짓을 하며 헬기를 향해 인사한다. 건강하고 즐거운 노동자와 새롭게 변모하는 소련의 모습을 넣은 것은 어떤 면에서
감독의 의도가 아닐 수 있다. 세피트코의 영화는 검열 당국의 심기를 늘 불편하게 했고, 이 영화 또한 그러했다. 세피트코 영화 속
인물들의 고뇌, 방황, 불행과 고통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것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표토르가 구두에 그린 십자가는 단지 구급 헬기와 구급차에 새겨진 마크가 아니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표토르는 자신을
살아가게 만들 중대한 목표를 찾고 있다. 남자는 자신이 만난 민중들의 얼굴 속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비상(Ascent, 1977)'에서도 예수를 닮은 남자 주인공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면서 구원과 희생의 의미를 말했던
세피트코는 이 영화에서도 클로즈업 쇼트를 사용한다. 시골 마을의 보건소에서 표토르는 뇌종양을 앓는 소녀의 엑스레이를 보게 된다.
과거 그는 개를 대상으로 한 뇌종양 수술에는 성공했지만, 연구소를 그만 두고 스웨덴 행을 택하면서 연구는 중단되었다. 자신이 계속
연구를 했더라면 낫게 할 수도 있었던 소녀의 얼굴을 보며 표토르는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세피트코는 이 소녀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강조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한 사람의 인생의 선택과 그것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성찰한다. 영화 속
표토르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뛰어난 의학자로서 자신의 연구로 세상에 기여할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며, 그가 그것을 저버렸을
때 그 자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의 삶이 달라진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고 영화는 일러준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피트코 감독 자신의 신념처럼 보인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
영화를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에 이르게 만드는 것,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영화의
예언자적 기능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대중 문화 산업에 종속된 영화가 '재미'와
'수익'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것은 이제 보편적인 추세가 되었다.
'당신과 나'의 불친절한 서사, 쉽게 이입될 수 없는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와 관객들 사이의 간극을 크게 만든다. 거기에는 영화
당국의 검열이라는 요소도 개입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세피트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은 낯설고 투박하게 보인다. 감독의 유작이 된
'Ascent'가 빛을 발하기까지 그 중간 단계로서의 징검다리 같다는 인상도 준다. 영화의 제목 '당신과 나'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영화의 첫부분, 스웨덴에서 돌아온 표토르는 샤샤에게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도와달라며, 함께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안온한 삶을 위해 각자의 길을 걸어갔던 두 사람의 삶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고 불행해 보인다. 엄혹한 공산 정권 치하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사명감과 개인적 선택과의 괴리, 세피트코는 고뇌하는 의사 표토르를 통해 그 삶이 가진 무게감과
속내를 드러낸다. 'Ascent'의 영화 음악을 담당했던 작곡가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ke)가 이 영화에서도
종교적 영성의 분위기를 더한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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