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1980년대 뉴욕의 펑크와 SF가 만났을 때, Liquid Sky(1982)

 

*이 글은 영화 'Liquid Sky(1982)'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영화는 뉴욕의 신데렐라에 관한 영화죠."

  영화 'Liquid Sky(1982)'의 촬영 감독 Yuri Neyman은 그렇게 대답했다(출처: modernmythology.net과의 인터뷰). 마약과 섹스, 동성애자와 양성애자, 외계인, 클럽의 네온 조명과 패션 모델, UFO와 과학자... 그 모든 요소를 다 섞어 넣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희한한 1980년대의 cult movie가 현대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면 그 대답이 얼마나 간명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소련 출신으로 1976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슬라바 추커만(Slava Tsukerman) 감독은 1982년에 자신의 아내와 공동 집필한 시나리오로 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500만 달러의 예산으로 만든 이 영화는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1700만 달러에 이르는 수익을 냈다. 2021년의 관객의 눈으로 보아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영화, 대체 'Liquid Sky'는 어떤 영화인가?

  영화는 뉴욕 뒷골목의 어느 클럽을 비춰주며 시작한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특이하고 중독성 있는 신디사이저 음향이 흐르는 가운데, 클럽의 사람들은 한창 춤에 빠져있다. 패션 모델로 마약 중독자이며 양성애자인 마가렛은 동성연인 에이드리언과 같이 살고 있다. 에이드리언은 클럽에서 음악 공연을 하기도 하지만, 본업은 마약상이다. 마가렛과 비슷한 외모의 지미(마가렛을 연기한 Anne Carlisle이 1인 2역을 한다)는 경쟁 관계에 있는 남자 모델이다. 지미는 마가렛을 괴롭히며 모욕감을 준다. 그런데 그들이 있는 클럽 건물의 상공에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나타난다. 이 비행체는 외계에서 온 것으로 마가렛의 집 옥상에 자리잡는다. 한편, 독일에서 이 UFO를 추적하러 뉴욕으로 날아온 과학자 요한이 있다. 그는 우연히 만난 지미의 엄마 실비아의 집에 자리잡고 UFO와 마가렛의 동향을 관찰한다. 괴비행체가 마가렛의 근처에 자리잡고 나서 마가렛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의 줄거리를 파악하는 일은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쯤 지나야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 'Liquid Sky'는 편집이 무척 특이하다. 일반적인 헐리우드의 영화 문법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 영화를 촬영한 소련 출신의 Yuri Neyman이 '쿨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라고 불리는 러시아 몽타주 기법을 쓴 데에서 기인한다. 이 기법은 별개의 의미를 가진 쇼트를 연속적으로 이어붙여서 새로운 의미를 파생시킨다. 영화는 전혀 관련이 없는 서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바로 이어 붙인다. 예를 들면 마가렛과 지미의 대화 장면에 마약 중독자 폴과 그 아내의 이야기가 바로 이어진다. 이런 개연성 없는 생뚱맞은 편집에 대해 Neyman은 사건의 동시성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라고 언급했다. 

  그런 편집과 더불어 외계인의 시점(외계인은 사물이 아니라 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한다)에서 보여지는 특수 효과 장면, 등장 인물들의 펑크 의상과 분장, 영화 전편을 흐르는 신디사이저 음악(주요 테마는 감독이 작곡가에게 직접 제시했다)은 관객의 눈과 귀를 단단히 붙잡는다. 마치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영화는 계속 출렁거린다. 주인공 마가렛은 신데렐라가 계모와 두 의붓자매에게 온갖 구박을 받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학대와 모욕, 심지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까지 당하는 마가렛. 그런데 기이하게도 마가렛과 관계한 이들은 모두 죽는다. 마가렛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혼령이 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외계 생명체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마약을 에너지원으로 하는 외계인은 뉴욕에서 더 효과적인 에너지원을 사람들에게서 발견한다. 성에너지를 탈취당한 이들은 모두 죽지만, 불감증이었던 마가렛은 살아남는다.

  이 괴상망측한 독립 SF영화는 1970년대에 활성화된 미국의 심야 영화관(주로 컬트 공포 영화를 상영)에 내걸리면서 꽤 짭짤한 흥행 수익을 냈다. 어떤 면에서 'Liquid Sky'는 그러한 'Midnight Movie'의 끝물을 화려하게 장식한 영화였다. 1982년에 만들어졌으나 영화는 그 시대를 한참이나 앞질러간 유행 감각을 보여준다. 특히 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등장 인물들은 이 영화가 지닌 비주류적 감성을 드러낸다. 물론 마약과 외설스런 장면에 거부감을 지닌 관객들에게는 시간의 힘도 그것을 누그러뜨리기는 어렵다. 영화의 제목 'Liquid Sky'는 헤로인을 칭하는 비속어이다. 슬라바 추커만 감독은 이민자로 자신이 관찰하고 탐구한 뉴욕의 하위 문화를 극한의 방식으로 영화에 재현한다.

  이제, 영화의 촬영 감독 Neyman의 설명이 조금은 와닿을지 모른다. 'Liquid Sky'는 1980년대 뉴욕 클럽의 펑크 신데렐라 마가렛이 호박마차(UFO)를 타고 왕자님(외계 생명체)과 함께 떠나는 이야기이다. 제작비의 압박 때문에 호박마차로 쓰인 UFO는 크게 만들 수가 없었다. 큰 접시 크기의 비행체를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하지만, 관객의 영화적 상상력은 언제나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이 '선 넘은' 신데렐라 스토리는 거칠고 소란스러우며, 뒤틀리고 특이한 유머 감각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에서 수수께끼로 사람들을 낚길 기다리던 스핑크스처럼 'Liquid Sky'는 오늘도 자신의 관객을 기다리는 중이다. 


*사진 출처: newtimesslo.com  영화 속 지미와 마가렛을 연기한 Anne Carlisle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