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길 잃은 이들의 쓸쓸한 노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 1961)

 

  여배우는 촬영장에 늦기 일쑤였다. 정서 불안에 심한 약물 중독 상태였으므로 촬영은 힘겹게 이루어졌다. 시나리오를 쓴 여배우의 남편은 쓰디쓴 결혼 생활의 끝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이 영화는 버거운 숙제였다. 대본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고, 배우들은 촬영 당일에 '쪽대본'을 받는 일이 잦았다. 문제가 있는 것은 그 두 사람 뿐만이 아니었다. 주연 남자 배우들 가운데 한 명은 여배우와 비슷한 처지였다. 역시 약물 중독 상태였던 그는 여배우에게 연민의 대상이었다. 여배우가 보기에 그는 자신보다 더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감독 또한 촬영에 집중하지 못했다. 촬영지 네바다 주는 도박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천국이었다. 감독은 밤이면 도박장에서 시간을 보냈고, 낮에는 촬영장의 감독 의자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졸았다. 그것이 영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 1961)'을 찍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여배우는 마릴린 먼로, 먼로가 자신 보다 걱정한 남자 배우는 몽고메리 클리프트, 쪽대본을 양산한 여배우의 남편은 극작가 아서 밀러, 도박장과 촬영장을 오간 감독은 존 휴스턴이었다. 

  리노에서 이제 막 이혼을 한 로즐린은 정비공 귀도(일라이 왈러크 분)와 그의 카우보이 친구 게이(클라크 게이블 분)를 알게 된다. 귀도는 로즐린에게 매혹되지만, 로즐린은 곧 게이와 연인이 된다. 그들이 로데오 구경을 가는 길에 떠돌이 카우보이 퍼스(몽고메리 클리프트 분)가 합류한다. 퍼스는 로데오 경기에서 부상을 입고, 그런 퍼스를 보며 로즐린은 연민을 느낀다. 귀도와 게이는 사막의 야생마 머스탱(mustang)을 잡는 일감을 맡고, 곧 그들은 말 사냥을 위해 길을 떠나는데...

  매력적인 외모의 로즐린은 불행한 결혼생활에서 이제 겨우 벗어났을 뿐이다. 영화의 도입부, 로즐린은 이혼 법정에서 진술할 증언을 외운다. 증언에는 남편의 폭행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실제로 로즐린 역의 마릴린 먼로는 전 남편인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의 폭력에 시달렸다. 먼로는 디마지오와 이혼 후 극작가 아서 밀러와 재혼했다. 'The Misfits'는 아내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넘쳐났던 밀러가 1957년에 쓴 단편이었다. 그 소설은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아내에 대한 환멸과 비난이 더해진 시나리오가 된다. 게이는 로즐린에게 세상에서 가장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한 여자라고 말한다. 극 중에서도 꽤 나이차이가 나는 이 커플은 실제 밀러와 먼로의 관계(밀러는 먼로 보다 11살이 더 많았다)를 떠올리게 만든다.

  거친 카우보이로 살아온 게이에게는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친구 귀도가 그나마 짓다 말은 엉성한 집이 있는 반면, 젊어서 가족을 떠나 떠돌았던 게이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술에 취해 장성한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그는 로즐린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아줄 수 있냐고 묻지만, 로즐린은 대답을 회피한다. 연민과 애정이 뒤엉킨, 순탄치 못했던 밀러와 먼로의 결혼 생활은 이 영화와 함께 5년 만에 끝난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밀러는 영화사 사진 작가와 만남을 가졌고, 둘은 결혼했다(그들의 딸 레베카 밀러는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부부가 된다).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길을 찾아요?"

  주인공 로즐린 역의 먼로는 어두운 밤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그렇게 묻는다. 운전을 하던 귀도는 하늘의 별을 보고 가면 된다고 말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참전 군인으로 비행기 조종사였던 귀도는 자신이 떨어뜨린 폭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른다며 로즐린에게 털어놓는다. 아내를 위해서 그가 지으려던 집은 아내의 죽음과 함께 중단되었다. 반쯤 지어진 그 집에서 로즐린과 함께 하며 집을 완성하길 꿈꾸지만, 여자는 그에게 마음이 없다. 로데오를 떠돌며 번 돈으로 입에 풀칠이나 하는 퍼스는 재혼한 어머니와 계부가 싫어서 집을 나왔다. 아무런 삶의 목적도 없는 그는 마치 길 잃은 강아지처럼 불쌍하고 외로워 보인다. 퍼스 역의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경력의 한창 때인 1956년의 교통사고로 얼굴이 망가졌고, 사고의 후유증으로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으나 실질적으로 영화 'The MIsfits'는 그의 경력을 마감하는 마지막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The Misfits'은 도대체 무얼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으로 채워져 있다. 인물들의 대사는 극작가인 밀러답게 연극적으로 들리는데, 사막의 야생마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영화 대신 차라리 연극으로 만드는 것이 나았겠다 싶기도 하다. 등장 인물들이 보여주는 갈등의 본질 또한 그다지 쉽게 와닿지 않는다. 뇌쇄적인 외모의 로즐린에게 매혹된 세 명의 남자들은 기묘한 연대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들이 영화의 후반부에 보여주는 야생마 몰이는 극적인 긴장감과 감정의 폭발을 야기하지만, 그것은 어설프고 쉽게 봉합되며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로즐린의 하숙집 여주인으로 나온 이사벨은 로즐린과 여정을 함께 하다가 극 중반에 사라져 버린다. 원숙한 델마 리터가 연기한 이사벨은 나름대로 극의 균형을 잘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밀러는 이사벨을 중간에 퇴장시키고 인물들을 불안과 혼란 속에 방치한다. 야생마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며 절규하는 로즐린과 돈벌이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귀도와 게이, 로즐린에게 동화되어 잡은 말을 놓아주는 퍼스, 이 네 명의 인물들은 정말이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제목 'The Misfits'는 영화 내적인 부분을 비롯해, 영화와 관련된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와도 뜻밖의 공명을 만들어 낸다. 밀러와 먼로의 파탄난 결혼 생활, 약물 중독 문제로 고생했던 먼로와 클리프트, 촬영을 끝낸 직후에 세상을 뜬 클라크 게이블, 도박꾼 감독의 악전고투 속 완성작은 그렇게 온갖 부조화와 맞닿아 있다. 영화는 대개의 경우 인생을 모방하지만, 'The Misfits'를 보고 있노라면 인생이 영화와 함께 흘러가는 그 어떤 무언가가 아닌가 싶은 쓸쓸한 감정이 든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아, 홍상수: 물안에서(In Water, 2023)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듯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영상원 본관 3층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열린 교수 연구실 안쪽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이상한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홍상수였다. 그는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기를 두들기던 그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는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는 내가 다시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해 가을, 홍상수가 영상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홍상수의 강의는 영화과 학생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거의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상원을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교수직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나는 홍상수의 그 지치고 지루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결국 떠날만한 때에 떠났다. 그건 학생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     어제, 홍상수의 2023년 작 영화 '물안에서'를 보았다. 러닝타임 61분의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이 초점이 나간 상태(ouf of focus)로 흐릿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화면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나오니, 관객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장인물은 세 명. 배우로 활동하던 승모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찍겠다며 섬에 왔다. 승모와 동행한 사람은 촬영을 맡은 친구 상국, 연기를 할 여배우 남희이다.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시나리오조차 쓰지 않았다. 상국과 남희는 승모가 찍을 영화가 어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