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한 성찰, The Imposter(2012)와 American Animals(2018)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은 '쟤들 선 넘네'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범죄 피해자가 된 도서관 사서도 인터뷰에서 들려준다. 'cross the line', 중산층 출신으로 미래가 보장된 4명의 백인 대학생들은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고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룬다. 바트 레이튼(Bart Layton) 감독의 2018년작 'American Animals'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2004년, 트란실바니아 대학교 도서관에서 있었던 고서적 강탈 사건을 재연한다. 특이하게도 사건과 관련된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가 중간 중간에 들어간다. 레이튼 감독은 이전 작품인 다큐 'The Imposter(2012)'에서는 영화적 형식을 잘 결합시켰는데, 'American Animals'는 역으로 극영화의 틀에 다큐멘터리를 이식시켰다. 

  미술을 전공하는 스펜서는 도서관 안내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매혹시키는 고서적과 만난다. 19세기 미국의 자연 화가이며 조류학자 존 오듀본(John Audubon)의 화첩 'The Birds of America'였다. 아름다운 핑크 플라밍고가 펼쳐져 있는 그 화첩은 무려 1200만 달러에 달하는 희귀한 책이었다. 약간의 비행(非行) 기질이 있는 친구 워렌은 스펜서가 흘리듯 말한 그 이야기에 혹한다. 그걸 훔쳐보면 어떨까, 하고 했던 농담은 1년이 지난 뒤에 치밀한 계획으로 변모한다. 모범생 회계학과 학생 에릭, 운동을 좋아하는 채스가 거기에 합류하고, 4명의 대학생들은 마침내 결전의 그날에 강도로 돌변하는데...

  영화는 Heist film의 전형적인 경로를 따라간다. 훔쳐야할 대상이 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이며,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된다. 레이튼 감독은 4명의 영화 속 인물들을 내러티브에 풀어놓고,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를 병치시킨다. 그런데 그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영화 속 워렌이 편의점에 들른 스펜서를 차에서 기다리는 장면에서, 진짜 워렌이 옆자리에 앉아 있고 둘은 대화를 나눈다. 현실의 스펜서는 영화 속 배우들이 도서관을 습격하기 위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길가에서 지켜본다. 영화와 실제의 경계는 흐릿해지며 둘은 마구 뒤섞인다. 실제 인물들과 비슷하게 닮은 외모의 배우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약간의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은 'The Imposter'에서 레이튼이 썼던 방법이기도 하다.

  스페인에서 발견된 16살 소년은 자신이 3년 전 미국 텍사스에서 실종된 '닉'이라고 말한다. 닉은 스페인으로 날아온 누나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고, 기다리던 가족들의 환대를 받는다. 언론도 대대적인 관심을 보이는 가운데 이 소년과 관련된 수상한 점들이 드러난다. 금발에 푸른색의 눈동자였던 13살 소년 닉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어색한 영어를 구사하는 청년의 외모로 나타났다. 프레데릭 부르댕, 그는 실종 아동을 사칭하는 전문 사기꾼이었다. 'The Imposter'는 시작부터 그의 사기 행각을 본인의 내레이션으로 들려준다.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이 놀라운 사기극은 부르댕을 빼다 박은 배우를 기용해서 다큐 속 액자 형식의 스릴러물이 된다. 실제 부르댕의 내레이션이 재연 배우의 입모양에 겹치기도 한다.  

  바트 레이튼은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보다는 실제와 허구의 모호한 경계, 서로를 모방하면서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상황 자체에 관심을 둔 것처럼 보인다. 'American Animals'의 주인공들은 화첩 강탈을 모의하면서 Heist film을 열심히 본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자신들의 계획이 완벽하게 실행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로 펼쳐졌을 때, 그들은 겁에 질려 당황하고 허둥대며 무거운 화첩을 들고 나올 수 없어서 도망치기에 급급하다. 죄책감과 발각될 것이라는 불안은 이후 그들의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장물을 팔아 나눈 돈으로 멋지게 잠적하는 영화와 같은 결말은 그들에게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7년형의 감옥 생활이었다.    

  도대체 왜,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젊은이들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던 것일까? 실질적인 주동자라고 할 수 있는 워렌의 경우는 부모의 이혼이라는 개인사적인 압박감이 작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생을 뒤바꿀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과는 달리 짜릿하고 멋진 상상 속의 세계, 그것을 현실로 그대로 재현하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그들이 도서관을 습격한 날, 오듀본의 화첩 속 그림은 이전의 플라밍고가 아니라 먹잇감을 나꿔채는 독수리로 바뀌어 진열되어 있었다. 평범한 대학생들은 흉폭한 포식 동물이 된다. 현실과 허구의 벽이 무너졌을 때 발생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마찬가지로 'The Imposter'의 부르댕도 실종된 이들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면서 희대의 사기꾼이 된다. 실종자 가족들의 고통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사이코패스 범죄자에게 '상상'은 '현실' 그 자체로 기능한다.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낸 500여명의 가상 신분의 인물들과 그들의 과거사는 사기꾼과 뛰어난 이야기꾼의 차이가 종잇조각 한 장임을 보여준다. 부르댕에게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그들 모두는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넘지말아야할 위험한 선을 넘었죠.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들 스스로 알고 있었는지 궁금해요."

  강도로 돌변한 대학생들의 공격을 받았던 사서는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한다. 'American Animals'의 실제 인물들은 거기에 대해 그 어떤 답변도 들려주지 않는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서는 그들의 얼굴에는 회한이 가득하다. 흔히 예술은 삶을 모사한다고 말한다. 감독 바트 레이튼은 현실의 모사로서의 허구,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어떻게 실제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자신의 두 작품을 통해 주의깊게 성찰한다.


*사진 출처: cinemapolis.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