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패전의 그늘 속에 움트는 희망과 사랑,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石中先生行状記, Conduct Report on Professor Ishinaka, 1950)

 

  분명히 패전은 일본 국민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石中先生行状記, 1950)'를 보고 있노라면, 그 즈음의 일본이 서서히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작가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郎)는 1948년부터 1954년까지 발표한 단편 소설 40편을 묶어서 4권의 책으로 펴냈다. 소설에는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골 마을의 선생 이시나카가 나온다. 주인공 이시나카 선생은 아오모리현(青森県)의 농촌 마을에 살면서 자신이 듣고 경험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은 꽤 인기가 있어서 1950년에 신도호(新東宝)에서 영화로 제작이 되었다. 영화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 번째 이야기의 배경은 마을의 과수원이다. 마을 청년은 패전이 임박한 시기에 자신이 과수원 땅에 군부대의 석유 드럼통을 묻어놓았노라고 말한다. 석유값이 올라 귀하게 취급되는 시기에 그것을 발견한다면 복권 당첨이나 다름없다. 이시나카 선생, 마을의 램프 가게 주인이 청년과 함께 과수원에서 드럼통 발굴에 나선다. 그러나 청년의 기억은 불확실하고, 그 넓은 과수원을 다 헤집어 놓는 것도 어렵다. 곧 이시나카 선생은 청년의 속셈이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된다. 과수원 주인의 딸에게 반한 청년이 어떻게든 만날 구실을 찾아보려고 나름의 꾀를 낸 것.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과수원집 처녀와 마을 청년은 결혼을 약속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돋보이는 것은 농촌 마을의 자연과 그곳 사람들의 순박한 삶이다. 피폐해진 전후의 경제 상황에서도 농부들은 땅에 의지해서 삶을 재건해 나갈 수 있었다. 일종의 향토 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원작자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이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진 것도 그 지점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웃음이 필요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하고 힘든 시절이지만 영화 속 농촌 마을 사람들은 찌들려 있거나 탐욕스럽지 않다. 이시나카 선생은 청년의 거짓말을 눈감아 주며, 청년과 과수원집 딸의 앞날을 축복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서점 주인 야마다와 손님 키하라는 선정적인 무희들의 공연을 보러 간다. 야마다의 딸은 그런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남자 친구를 불러 함께 아버지를 골려주고 싶어한다. 남자 친구는 아버지와 동행한 손님 키하라의 아들이다. 딸은 공연을 보고 나오는 아버지에게 누가 먼저 보자고 한 것이냐고 캐묻는다. 야마다와 키하라가 서로를 탓하는 가운데 두 연인도 각자의 아버지 편을 든다. 자식의 연애를 망치고 싶지 않은 아버지들은 이시나카 선생을 찾아가 중재를 부탁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무희들의 춤 공연을 꽤 비중있게 담는다. 그곳에 모인, 대개는 중년의 남자들은 호기심과 욕망의 눈빛으로 무희들의 몸을 응시한다. 그 장면은 일본인들이 이제 먹고 사는 문제의 절박함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다지 여유롭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아나선다. 서점 주인과 손님은 다소 남사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공연을 보는 것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다. 딸은 그런 아버지를 질책하지만, 이시나카 선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그 욕망을 옹호한다. 변화하는 일본인의 성의식은 새로운 세대의 개방성과 솔직함으로 이어진다. 언쟁으로 멀어졌던 두 연인은 사랑의 감정을 되새기며 화해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배우의 길에 막 들어선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이웃 마을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는 농부를 연기한다. 병원에 입원한 언니를 간호하러 간 철부지 아가씨 요시코는 병원 환자가 봐주는 손금 해석을 듣는다. 조만간 배필을 만나 결혼할 거라는 말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웃 마을 청년 나가사와의 건초 마차에서 잠이 들어버린 요시코. 청년의 집은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여 들뜬 분위기가 된다. 마을 마츠리 행사에서 두 사람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나가사와의 어머니는 요시코가 떠나기 전에 경찰을 부르는데...

  아마도 세 번째 에피소드는 오늘날의 관객에게 가장 기이하게 비춰질 것이다. 나가사와의 어머니가 경찰을 부른 이유는 요시코의 '처녀성(virginity)'을 보증하기 위해서이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혼기를 앞둔 아가씨가 외박을 한다는 것은 정조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사와의 어머니는 요시코를 자신이 잘 보호했다는 사실을 공권력에 기대어 인정받고자 한다. 요시코에게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경찰은 동행한 이시나카 선생에게 요시코의 처녀성이 손상되지 않았음을 간결하게 기술하라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뜨악하게 느껴지는 이 에피소드에서 여성의 몸은 국가의 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영역에 자리한다. 순결하고 건강한 여성만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릴 자격을 얻는다. 경찰은 요시코의 몸을 훑어보며 처녀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을 재차 확인한다. 여성은 새로운 세대를 낳아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군국주의의 끈질긴 망령은 여전히 일본인들의 삶과 내면을 옭아맨다.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에는 그렇게 전후 일본의 서늘하고도 일그러진 이면이 포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루세 미키오는 변화하는 젊은 세대의 사랑 이야기 속에 웃음과 희망을 포개어 놓는다. 흥행에도 성공한 이 영화에는 패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강렬한 소망이 투사되어 있다.



*사진 출처: listal.com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 리뷰

아내(妻, Wife,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ife-1953.html

산의 소리(山の音, 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1954.html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late-chrysanthemums-1954.html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flowing-1956.html

안즈코(杏っ子, Little Peach,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little-peach-1958.html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1959.html

가을이 올 때(秋立ちぬ, Autumn Has Already Started, 196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pproach-of-autumn-1960.html

여자의 자리(女の座, A Woman's Place, 196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place-1962.html

여자의 역사(女の歴史, A Woman's Life, 196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life-1963.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