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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의 숨겨진 역작, 여자의 역사(女の歴史, A Woman's Life, 1963)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63년작 '여자의 역사(女の歴史, A Woman's Life)'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뭔가 찬밥 취급을 받는 듯하다. 1962년에 만든 비슷한 제목의 '여자의 자리(女の座)'가 좀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 다카미네 히데코가 주연을 맡았다. '여자의 역사'는 프랑스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을 바탕으로 카사하라 료죠가 시나리오를 썼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신상옥 감독이 1968년에 만든 '여자의 일생'도 있다. 최근작으로는 프랑스에서 2016년에 만든 영화가 있다. 이런 걸 보면 정말로 모파상의 그 소설이 시대를 뛰어넘어 대단한 흡인력을 가졌구나 싶기도 하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이 좀 넘는데, 보다보면 영화를 오밀조밀하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나루세 미키오의 그저그런 범작으로 여길만한 작품은 아니라는 뜻이다. 시나리오도 원작 소설의 기본 뼈대만을 취했을 뿐, 그 내용은 일본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여인의 일생으로 소설과는 차별성이 있다. 무엇보다 주연을 맡은 다카미네 히데코의 열연은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의 나이는 39살이었는데, 20대의 아가씨부터 중년에 이르는 나이까지 자연스럽게 소화해낸다. 내가 놀란 것은 이 여배우는 단지 분장만으로 '늙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걸음걸이와 행동으로 나이든 사람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중년의 여인을 보여주기 위해 약간은 구부정하고 느리게 걷는 걸음걸이며, 목소리도 고음 대신 중저음을 사용한다. 배우로 타고난 사람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자신의 미용실을 갖고 있는 노부코는 연로한 시어머니, 장성한 아들 코헤이과 함께 살고 있다. 코헤이는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며 노부코에게 알리지만, 노부코는 며느릿감이 카바레 종업원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한다. 제멋대로이며 엄마의 심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아들은 노부코의 반대에도 살림을 차린다. 노부코는 그런 아들을 보며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새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노부코. 영화는 현재의 노부코가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을 중간중간 넣어서 노부코의 지나온 삶을 보여준다. 애정없이 이루어진 중매결혼, 남편의 징집과 전사, 남편의 친구 아키모토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전후의 피폐한 삶, 그리고 갑작스런 사고로 아들을 잃기까지 노부코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나루세 미키오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삶의 시련과 마주하는 여자 주인공을 그려내면서도 눈물을 짜내는 멜로 드라마로 만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인공 노부코는 강인한 삶의 의지를 지닌 여성이다.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시대적 상황이 노부코를 더욱 더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과부로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아들을 키워야 하는 노부코는 암거래 쌀 장사까지 한다. 영화는 전후의 혼란과 궁핍한 현실을 꽤나 세밀하게 묘사한다.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 거리의 구두닦이 소년들, 찐빵을 먹는 이를 계속 쳐다보는 굶주린 이들... 나루세 미키오는 마치 인물화를 그리면서 주변 풍광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화가처럼 영화에 시대적 사실성을 더한다.

  아버지를 빼놓고, 노부코에게 남자들이란 고통의 근원이었다. 여자 문제는 없다고 믿었던 남편은 노부코를 속였고, 노부코가 반대한 결혼을 한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떴다. 노부코와 삶의 연대의식을 공유하는 시어머니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난 시아버지는 여관방에서 게이샤와 동반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어머니가 하는 대사는 통렬하게 들린다.

  "남자들은 여자를 아이로 만들어 버리지. 자기들은 멋대로 하고 살아. 그러고는 여자들 보다 먼저 죽어. 난 다음 생에서는 꼭 남자로 태어날 거야."

  노부코는 자신을 찾아온 며느리 미도리와 손자를 보듬는다. 이 어린 꼬마는 노부코에게 남은 삶의 빛이 되어줄까? 그렇게 한 여자의 삶의 역사를 그린 영화는 끝이 난다. 나루세 미키오와 다카미네 히데코의 팬들은 이 영화를 놓치기 어려울 것이다. 과하게 감상적인 영화 음악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여자의 역사'는 충분히 관객의 기대에 보답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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