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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지는 것들이 남기는 애수,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

 

*이 글에는 영화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다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강물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비춰진다. 일본의 작가 코다 아야(幸田文)가 1955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 속에서 게이샤 츠타의 집에서 일하게 되는 가정부 오하루는 어떤 면에서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오하루는 게이샤 집에서 일하며 그네들의 삶의 속내를 들여다 보게 된다. 극중에서 오하루는 남편과 아들이 죽은, 혈혈단신의 40대 후반의 과부로 나온다. 작가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이혼하고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어려운 형편 때문에 46살에 게이샤 집 가정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는데, 그 소설이 '흐르다'이다. 실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은 꽤 인기를 끌었고, 코다 아야에게 작가로서 살아갈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리카는 직업 소개소의 추천서를 들고 츠타노야(츠타의 집이란 뜻)를 찾는다. 리카는 집주인 츠타와 그 딸 가츠요, 조카 요나고와 그 어린 딸 후지코, 오십 줄에 들어선 게이샤 소메카, 제멋대로 행동하는 젊은 게이샤 나나코, 그리고 수시로 집에 드나드는 츠타의 큰언니를 만나게 된다. 리카라는 이름 대신 오하루로 불리우게 된 가정부는 성실하고 따뜻한 마음씀으로 곧 이 집안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 그러나 오하루는 이 집안이 빚 때문에 몰락해가고 있으며,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츠타는 남자에게 속아 집이 저당잡혀 있고, 큰언니에게 진 빚도 갚아야 한다. 돈 떼먹고 달아난 게이샤의 삼촌은 조카 데리고 번 돈을 내놓으라며 툭하면 와서 행패를 부린다. 사람좋고 유약한 성품의 이 집주인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가 벅차다. 큰언니는 돈 많은 철강회사 임원을 소개해줄 테니 만나보라고 떠밀지만, 마음에도 없는 자리에 나가고 싶지는 않다. 선배 게이샤 미즈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예전의 정인(情人)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한다. 공들여 단장을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갔지만, 바람만 맞고 들어오는 츠타. 과연 츠타노야는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을 수 있을까?

  영화는 츠타노야에 들어오게 된 오하루(타나카 키누요 분)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게이샤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오하루의 시점은 곧 관객의 시점이 된다. 이 예의바르고 분별력 있는 가정부는 모든 행동거지에 나름의 품위가 있다. 무도하게 행패를 부리는 게이샤 삼촌에게도 공손한 말로 응대하며, 배탈이 나서 아픈 꼬마 후지코가 주사를 잘 맞을 수 있도록 달랜다. 불러주는 데가 없어서 궁색하고 기가 죽어있는 소메카의 입장도 잘 헤아려 배려해준다. 츠타노야의 유일한 일반인이면서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품성을 지닌 오하루는 몰락해가는 게이샤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다. 오하루가 바라본 그 세계는 화려한 외양 뒤에 돈의 무게에 짓눌려 있으며, 한없이 외롭기 짝이 없는 여자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에게 낙이라고 해봐야 술과 노래, 의지할 남자를 찾는 것이다. 오하루가 머물게 된 츠타노야의 칸칸이 구획된 방과 비좁은 복도는 매우 폐쇄적이며, 그곳 사람들의 일상과 삶은 거기에 매여 있다.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존재가 있다면 츠타가 애지중지 키우는 고양이 푼토일 것이다. 이 느긋한 고양이는 집안 곳곳을 돌아 다니며, 아무에게나 가서 앵긴다.

  예능인(게이샤, 藝者)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매춘과 연계되어 있는 이 직업은 츠타노야처럼 쇠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나나코가 기모노 대신에 양장을 하고 일하러 나갈 때이다. 연회 공연 없이 곧바로 여관방으로 직행하는 것을 나나코는 내켜하지 않지만, 급변하는 일본 사회에서 더이상 예인의 전통은 존중받기 어려워졌다. 그러므로 츠타의 딸 가츠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기를 거부한다. 가츠요는 오하루에게 자신의 굽히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잠깐 게이샤 일을 하고 그만 두었다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그 세계에서 자란 가츠요는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나올 수 있을까 고민한다. 직업 소개소도 가보고, 이력서도 써본다. 친구로부터 봉제일을 배우면 취업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미싱 돌리는 연습도 한다. 남자에게 의탁하는 삶을 살아왔던 엄마와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가츠요의 머릿속에 결혼이란 선택지는 들어있지 않다. 그렇게 '흐르다'에서 전통과 현대는 충돌한다.

  그러나 츠타노야에서 가츠요의 선택은 유별난 것이다. 남자가 살지 않는 이 집은 그 어느 곳보다 남자를 필요로 한다. 막돼먹은 게이샤 삼촌이 수시로 와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이 집에 남자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츠타의 조카 요나고는 딸이 아프자 애아빠를 찾아 다닌다. 츠타는 행패부리는 게이샤 삼촌의 고발 건으로 경찰서까지 가게되는데, 그 일을 해결하는 것은 딸 가츠요가 아니라 선배 게이샤 미즈노의 조카 사에키이다. 오십 줄에 들어선, 게이샤로서는 일하기 힘든 소메카는 연하의 젊은 남자와 동거하다 차이자 울음을 터뜨린다. 사랑도 삶도 남자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그 세계의 돌아가는 방식에 가츠요는 냉소를 보내지만, 소메카는 남자없이 사는 삶이 가능하냐며 오히려 그런 가츠요를 비웃는다. 어쩌면 소메카의 그 말은 돈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냐로 치환될 수 있을지 모른다. 츠타노야의 사람들에게 남자만큼 필요한 것이 돈이기도 하다. 요나고의 남편은 아픈 애는 안보고, 약값이나 쓰라고 현관 문앞에 돈만 놓고 돌아간다. 일감이 없는 소메카는 맨밥에 간장을 비벼먹는다. 츠타는 과거의 후원자에게 경제적 지원을 바라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한다. 큰언니는 동생인 츠타에게 돈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내고, 돈은 언제 갚냐고 채근한다. 돈과 남자가 등치되는 이 게이샤의 세계에서 젊음과 아름다움의 상실은 몰락을 의미한다. 츠타노야의 미래는 점점 어두워진다.  

  결국 츠타노야는 팔린다. 츠타는 샤미센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오하루는 여전히 그 집에 머무른다. 그러나 집을 산 츠타의 선배 미즈노는 그 집을 요릿집으로 바꿀 생각을 갖고 있다. 일 잘하는 오하루에게 넌지시 자신과 함께 일하자고 하지만, 오하루는 편치 않은 마음에 거절한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츠타는 다시 찾아온 소메카와 함께 평화롭게 샤미센을 연주하고 있다. 비감하고 처연한 샤미센 소리는 오랫동안 관객의 귓가에 머문다. 사라질 운명의 츠타노야와 함께 그 집을 스쳐 지나간 많은 게이샤들의 젊음과 아름다움, 슬픔과 기쁨, 온갖 비밀과 노랫소리도 사라질 것이다. 원작자 코다 아야는 자신이 늘 즐겨찾던 스미다 강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곤 했다. 그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 늘 마치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사라지는 것 같았고, 그것은 마음 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었다고 적었다. 영화 '흐르다'의 나루세 미키오는 어느 게이샤 집안의 쓸쓸한 뒤안길을 통해 스러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수를 담는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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