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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성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

 

*이 글에는 영화 '만국(晩菊)'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빌려준 돈을 받아내려고 지인이 일하는 여관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결근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여자가 나가자, 여관에서 일하는 청소부는 여자가 걸어가는 방향 쪽으로 냅다 물을 뿌린다. 마치 '재수없는 여편네, 얼른 꺼져라' 하는 것 같다. 여자의 이름은 킨, 일숫돈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는 그 여자는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다. 또 다른 채무자의 가게에 가서는 정문이 아니라 뒷문으로 들어간다. 전번에 자신을 보고 도망쳤기 때문에, 미리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늘 집에 돈을 둔 여자는 대낮에도 도둑이 들까봐, 하녀가 잠깐 두부 사러 나간 새에도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은 '흐르다(流れる, 1956)'의 스핀오프(spin-off)처럼 느껴진다. '흐르다'에서 궁기 흐르는 늙은 게이샤 소메카로 나왔던 스기무라 하루코가 '만국'에서는 있는 것이라고는 돈 뿐인 은퇴 게이샤 킨으로 나온다. 영화는 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세 명의 은퇴 게이샤들의 사연이 어우러진다. '흐르다'에서 쇠락해가는 게이샤 집안의 이야기를 다룬 나루세 미키오는 은퇴 게이샤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 역시 '돈' 문제는 나루세 미키오의 주요한 관심사이다. '만국'의 주인공들은 어떤 형태로든 돈에 얽매여 일그러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아이들이 뛰노는 주택가 골목을 비추던 카메라는 킨의 안방으로 들어간다. 마치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루는 것처럼 킨은 돈 세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킨의 관심사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땅을 사들이는 것과 일숫돈을 받아내는 일이다. 괜찮은 집에서 청각 장애인 하녀를 두고 윤택한 중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킨과는 달리 동료 게이샤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따름이다. 타마에와 토미는 여관 청소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타마에는 번 돈을 파친코와 경마에 쓰느라 늘 돈에 쪼들린다. 킨에게 꾼 돈은 갚지도 못하고, 하나 뿐인 딸에게도 늘 돈 달라는 이야기만 한다. 건강이 좋지 않은 토미는 아들 키요시가 번듯한 직장이라도 얻어 자신을 부양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아들은 첩살이 하는 여자의 돈에 기대어 산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게이샤 노부는 남편과 작은 주점을 운영하지만,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다.

  은퇴한 게이샤들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만국'은 나이든 게이샤들의 맨 얼굴을 응시한다. 그러나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연 중년 여자의 삶에 무엇이 남아있는가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킨은 타마에와 토미가 자식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것을 보며, 자신에게 아이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킨에게는 남자도 없다. 타마에는 토미와 킨의 뒷담화를 하면서 킨에게는 '돈'이 곧 '남자'라며 비웃는다. 킨에게 과거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무용지물이다. 함께 죽자며 킨에게 매달렸던 세키도, 킨이 유일하게 사랑을 느꼈던 멋진 외모의 타베도 모두 킨의 돈을 바라고 찾아온다. 킨에게 돈이란 남은 여생의 동반자이다. 그 돈이 없는 타마에와 토미에게는 대신 자식이 있다. 그러나 타마에의 딸은 결혼으로, 토미의 아들은 일자리를 구했다며 어머니 곁을 떠난다. 그나마 의지가지가 되던 자식도 날아간다.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 장성한 자식을 떠나 보낸 중년의 부모가 느끼는 상실과 외로움의 감정. 특히 그 감정은 아이의 양육과 살림을 도맡아 했던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비록 게이샤로 먹고 사느라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했지만, 타마에와 토미는 떠나버린 자식들을 보며 회한에 젖는다.  

  돈도 자식도 없는 노부는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돈 받으러 온 킨은 노부에게 나이를 생각하라며 되지도 않는 일이라 말한다. 무골호인 같은 남편은 노부가 데리고 살기는 편하지만, 힘이 되어줄만한 사람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혈육 한 점 세상에 남기고 싶은 노부는 생당근을 열심히 먹으면서 아이를 바란다. 결국은 떠나버릴 자식, 그래도 있는 것이 나은 걸까? 자식들 빈자리로 허전한 타마에와 토미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술 뿐이다. 타마에는 자신에게 딸을 준 신에게 고맙다며 혀꼬부랑 소리로 주정한다.

  흐르는 강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타마에는 토미의 아들을 배웅하는 역전 다방에서 젊은 게이샤들을 본다. 그 게이샤들의 모습은 자신의 과거였다. 젊음도 남자도 인생도 그렇게 흘러갔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사라졌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타마에는 파친코 경품을 그러모을 것이며, 토미는 아들의 편지를 기다릴 것이다. 킨은 늘 그랬듯 자신에게서 달아나려는 돈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킨은 거간꾼과 함께 시골 땅을 둘러보러 떠난다. 역의 계단을 내려가는 킨의 발걸음은 왠지 활기차 보인다. 나루세 미키오는 명멸하는 불빛과 같은 중년 여인의 삶에 그렇게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는다. 여자로서의 삶은 이미 빛이 바랬지만, 아직 살아가야할 날들은 남아있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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