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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극 속에 펼쳐지는 여자의 삶, 여자의 자리(女の座, A Woman's Place, 1962)

 

*이 글에는 영화 '여자의 자리'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나오는 대담 프로그램을 보는데,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와 19편이나 되는 영화를 함께 찍었는데, 거의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루세 미키오는 늘 촬영장 어딘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고, '자, 액션'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냥 자신은 연기를 했다고. 나중에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따로 인사를 하고 집에 간 적은 없었고, '모두 수고하셨습니다'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이 여배우에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엄청 어렵고 무서웠던 존재였던 것 같다. 아니, 그럼 함께 찍은 영화 가운데 나루세 미키오의 연기 지도라는 것은 없었던 것일까? '야성의 여인(Untamed Woman, 1957)'을 찍을 때는 어려운 영화여서 어떻게 연기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아, 그거 금방이면 끝날 거야'하고 대답해서 당황했다고 한다. 아역 배우 때부터 출중한 재능을 보여줬던 연기 천재인 타카미네 히데코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까? 아무튼 그 인터뷰를 본 이후로, 타카미네 히데코가 나오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아무 말 없이 착착 돌아가는 그의 영화 촬영 현장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1962년작 '여자의 자리(女の座, A Woman's Place)'는 1962년 신년 특집으로 개봉한 가족 영화로 당시 활동했던 쟁쟁한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저런 배우들을 어떻게 다 데리고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영화를 찍을 수 있었는지,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영화이다.

  도쿄에 자리잡은 이시카와 집안의 가장(류 치수 분)의 갑작스런 병환을 계기로 그의 자녀들이 집에 모인다. 그는 첫 부인에게서 아들 켄타로와 지로, 딸 마츠와 우메코를, 재혼한 아내 아키에게서는 미치코와 나츠코, 유키코를 두었다. 장남 켄타로가 전사하고 며느리 요시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아들을 키우며 시부모와 함께 산다. 여관을 운영하는 욕심많은 딸 마츠, 꽃꽂이 교실을 운영하는 미혼의 독립적인 딸 우메코, 무능하고 속이기 잘하는 남편과 닮은 미치코, 결혼 적령기로 남편감을 찾는 나츠코와 유키코, 이렇게 바람 잘 날 없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잡화점을 하며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요시코가 중심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시카와 일가 구성원 각자의 삶을 고루고루 돌아가며 보여준다. 나루세 미키오의 특기란 이런 것이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치우치거나 부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 없다. 마치 바느질 자국이 보이지 않게 옷을 만드는 장인 같달까? 그런 감독의 솜씨 덕분에 관객들은 일가 구성원들 각양각색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게 된다.
 
  이 가족의 주요한 관심사는 혼기가 찬 딸들의 혼사 문제이다. 나츠코는 여동생 유키코의 지인 아오야마를 좋아하게 되지만, 동생의 마음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중매 결혼을 받아들인다. 영화에서 나츠코와 유키코는 양장을 하고 나오는데, 젊은 세대의 여성이 구시대적 관습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것은 의외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츠코와는 달리 기모노를 늘 입고 있는 우메코의 사고 방식은 현대적이다. 결혼에 대해 언급하는 부모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찾겠다고 말하는 우메코는 감정 표현도 직설적이다. 우메코는 첫 눈에 반하게 된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까지 생각한다. 신구 세대의 복식과 삶의 방식이 뒤엉켜 있는 틈 속에서 과부 며느리 요시코는 집에서는 앞치마를 두른 평상복으로, 외출할 때는 기모노를 입는다. 요시코의 유일한 관심사는 중학생 아들 켄짱의 학업이다. 그 아들이 요시코의 뜻대로 공부에 뜻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들은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의 기대 때문에 힘들다. 그러던 어느 날, 요시코는 기차 사고로 아들을 잃는다. 그 일은 요시코의 삶 전체를 뒤흔든다.

  남편이 죽은 뒤로도 시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아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돌아갈 친정이 없고, 여동생이 하나 있는 요시코에게 유교적 가치인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기대던 아들이 죽자 요시코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에 들어선다. 이시카와의 자녀들은 요시코가 시댁을 떠나 재혼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츠코와 유키코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부모의 넓은 집을 두고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각자 머리를 굴리느라 여념이 없다. 서글프게도 노부부는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자식들은 하나같이 다 쓸모가 없구려."

  영화는 일견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의 쓸쓸한 노부부와 그런 부모에게 무심한 자식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결국은 혈연이 아닌 며느리에게 깊은 신뢰와 애정을 보내는 '동경 이야기'의 노부부처럼, '여자의 자리'의 이시카와와 아키 부부도 며느리 요시코에게 집을 팔아 셋이 같이 살 작은 집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그들이 길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집에서는 자식들이 모여서 초조하게 부모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나루세 미키오는 요시코가 선택하게 될 인생의 새로운 자리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자식의 죽음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보는 일은 드문 일이다. 나츠코는 중매 결혼을 받아들이고, 유키코는 좋아하는 남자와 미래를 꿈꾼다. 우메코는 실연을 당하지만, 이전처럼 독립적인 자신의 삶으로 다시 돌아온다. 오직 요시코만이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겪는다.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잃은 요시코는 어떤 삶의 자리를 선택할까? 그렇게 '여자의 자리'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은 여자의 삶을 둘러싼 결혼과 가정이라는 촘촘한 그물망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드러낸다.


*사진 출처: aozoramusme.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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