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적 마침표,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Scattered Clouds, 1967)

  여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서있다. 정부 관료인 남편은 미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함께 떠날 예정인 부부에게는 반가운 아기 소식도 있다. 그런데 그 여자 유미코의 행복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남편은 불운한 자동차 사고로 숨을 거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자는 아기도 잃는다. 남편을 죽게 만든 사고의 가해자는 평범한 회사원 미시마. 자동차의 타이어가 터지면서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고였다. 남자는 무죄를 선고받는다. 비록 법적인 책임은 면했지만, 남자는 속죄의 의미로 매달 일정한 금액을 미망인에게 송금한다. 어떻게 보면 철천지원수 사이의 남녀. 그들은 예기치 못한 사랑의 감정에 빠진다.

  영화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Scattered Clouds, 1967)'은 나루세 미키오의 유작이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 해에 그가 만든 2편의 영화는 특이하게도 스릴러 영화였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 경력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가장 잘 하는 멜로 영화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감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영화는 그의 대표작 '부운(浮雲, Floating Clouds, 1955)'이었다.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고 원했지만 여자는 결국 영락한 신세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뜬구름같은 사랑의 부질없음과 아픔을 그려낸 '부운'의 흔적은 '흐트러진 구름'에서도 감지된다.

  '부운'의 남녀 주인공 토미오카와 유키코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장소는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밀림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국의 숲을 몽롱한 꿈속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곳에서 유부남인 남자는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여자는 불확실한 사랑의 미래에 자신을 던진다. '흐트러진 구름'에서도 그와 비슷한 장소가 나온다. 사별 후,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경제적 어려움과 남자들의 추근거림에 시달린 유미코는 고향으로 내려온다. 사고 때문에 좌천을 당한 미시마가 머물게 된 곳도 그 근처이다. 둘은 우연한 만남을 거듭하며 서로에게 끌린다. 그들이 비로소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게 된 곳은 유미코가 허브를 채취하는 숲속이다. '부운'의 인도네시아 밀림이 망각과 사랑의 장소였던 것처럼, 유미코와 미시마가 있게 된 숲속도 그들을 고통스러운 과거로부터 분리시킨다.

  나루세 미키오는 그 사랑의 행로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서서히 펼쳐서 보여준다. 유미코는 미시마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시마와 함께 하기 위해 떠나는 길, 그들은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게 된다. 구급차가 사고를 당한 남자를 싣고 나오고, 여자는 절규한다. 유미코와 미시마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강과 같은 상흔의 기억은 그렇게 재현된다. 고통스러운 과거는 결코 망각될 수 없으며, 그들이 함께하는 한 언제고 그것을 떠올리게 될 터였다. 이 비극적 로맨스는 일견 개인적 차원의 파국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인 함의를 지닌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부운'의 유키코와 토미오카의 사랑에는 꿈처럼 사라져버린 일본 제국주의의 전성기가 겹쳐있다. '흐트러진 구름'은 그 연장선상에서 전후 일본 사회에 내재된 상실과 트라우마에 대한 비관주의적 통찰을 보여준다. 일본의 침략 전쟁은 동아시아 식민지 국가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내면에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일본 국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군국주의에 협력한 동조자였다. 동시에 그들 자신은 전쟁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그들이 감내해야하는 죄책감과 상실감은 여전히 집단 무의식의 차원에 자리한다. 전후의 고도 경제 발전이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는 단지 그 상흔을 가려버렸을 뿐이다. 

  '흐트러진 구름'의 유미코와 미시마의 불가능한 사랑의 행로는 전후 일본 사회의 내재화된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은 고통스런 과거를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기 보다는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멀리 떨어지는 것을 택한다. 그것은 일본이 보여준 전후 역사적 책임에 대한 회피적 행태와도 맞닿아 있다. 나루세 미키오는 유작에서 자신이 동시대 일본 사회에 대한 통찰을 놓치지 않았음을 증명해낸다. 그는 여성의 삶에 대한 세밀한 관찰자로서 여성들을 둘러싼 시대의 저류를 영화 속에 흐르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렇게 감독이 살아온 시대와 만난다. 거기에는 전쟁과 여성, 가족의 삶에 대한 사실주의적 초상이 담겨 있다. '흐트러진 구름'은 나루세 미키오가 걸어온 그 영화적 여정에 어울리는 마침표인 셈이다.


*사진 출처: photogenie.be



**나루세 미키오 영화 리뷰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Conduct Report on Professor Ishinaka, 195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conduct-report-on-professor-ishinaka.html

긴자 화장(Ginza Cosmetics, 195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ginza-cosmetics-1951.html

엄마(Mother, 195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mother-1952.html

오누이(Older Brother, Younger Sister,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older-brother-younger-sister-1953.html

아내(Wife,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ife-1953.html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late-chrysanthemums-1954.html

산의 소리(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1954.html

흐르다(Flowing,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flowing-1956.html

아내의 마음(A Wife's Heart,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wifes-heart-1956.html

야성의 여인(Untamed Woman,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untamed-1957.html

안즈코(Anzukko,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little-peach-1958.html

권적운(Summer Clouds, Iwashigumo,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summer-clouds-1958.html

내 마음의 휘파람(Whistling in Kotan,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1959.html

가을이 올 때(Autumn Has Already Started, 196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pproach-of-autumn-1960.html

딸, 아내, 어머니(Daughters, Wives and a Mother, 196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daughters-wives-and-mother-1960.html

여자의 자리(A Woman's Place, 196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place-1962.html

여자의 역사(A Woman's Life, 196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life-1963.html

뺑소니(Hit and Run, 196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hit-and-run-1966.html 

여자 안의 타인(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stranger-within-woman-1966-juste-avant.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