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나루세 미키오의 독특한 스릴러물, 뺑소니(ひき逃げ, Hit and Run, 1966)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무섭다. 영화 '뺑소니(ひき逃げ, 1966)'의 주인공 쿠니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하나뿐인 어린 아들을 잃었다. 그 비극은 남편이 불운하게 세상을 뜬지 얼마되지 않아 일어났다. 쿠니코의 아들은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 사고를 낸 사람은 부잣집 운전기사로 재판에서 약소한 벌금형을 받았다. 쿠니코는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다. 그런 쿠니코에게 사건을 목격한 동네 주민이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본 뺑소니 운전자는 줄무늬 스카프를 두른 '여자'였다는 것. 쿠니코는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하지만, 경찰은 이미 끝난 사건이라는 말만을 할 뿐이다. 쿠니코는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다.

  이 영화에는 서로 다른 계층적 배경을 지닌 두 명의 엄마가 등장한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쿠니코는 전형적인 하층 계급의 여성이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쿠니코의 과거는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매춘부였던 쿠니코는 착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다. 그 결혼 생활은 불행했던 이 여자의 인생에서 선물처럼 주어진 행운이었다. 비록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쿠니코에게 아들은 삶의 버팀목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었다. 그것도 아주 억울하게. 자식잃은 어미의 가슴은 복수심에 불탄다.

  쿠니코의 아들을 사고로 죽게 만든 키누코는 부잣집 사모님이다. 남편 카키누마는 자동차 회사의 중역으로 키누코와는 정략 결혼으로 맺어졌다. 애정없는 결혼 생활, 키누코는 바람을 피운다. 여자가 아이를 치고도 그대로 달아난 것은 동석한 애인의 존재를 들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편의 운전기사가 죄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키누코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키누코의 삶. 하지만 키누코의 집에 가정부로 취직한 쿠니코는 곧 그 집안에 흐르는 냉기와 불행의 기운을 감지한다. '이상한(変な, 영어의 strange에 해당하는 뜻) 집구석이야.' 쿠니코는 야쿠자 남동생에게 그 집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키누코의 집은 진공 청소기를 비롯해 당시로서는 최신식 가전 제품과 세련된 서양식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키누코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이 여자가 느끼는 외로움을 채워주지 못한다. 키누코는 애인이 결별을 선언하자 큰 충격을 받는다. 부잣집 마나님 키누코의 불행한 삶은 자식 잃은 가난한 여자 쿠니코의 눈을 통해 관찰된다.  

  영화는 전후 일본 사회의 심화된 계층적 격차를 보여주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키누코의 죄를 뒤집어쓰기로 한 운전기사는 고용주 카키누마에게 돈을 요구한다. 징집으로 전쟁에 끌려갔던 그는 포로로 잡혔다가 늦게 풀려나는 바람에 마흔이 넘어서 취직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그가 부양해야할 처자식의 미래는 불안정해졌다. 그가 진범이 아니라고 의심한 쿠니코는 그의 집을 찾아가 진실을 말해달라고 애원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전경에는 운전기사와 쿠니코를, 뒷배경에는 두 아이와 병으로 누워있는 그의 아내를 보여준다. 그 장면은 전쟁이 드리운 어두운 그늘과 함께 돈 때문에 부유층의 윤리적 과오를 뒤집어쓰는 하층 계급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쿠니코는 키누코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복수극을 끊임없이 떠올린다. 나루세 미키오는 쿠니코가 그러한 상상을 떠올릴 때, 과다노출 처리함으로써 인물을 빛 속에 가둔다. 이러한 영화적 시도는 이전의 그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부분이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쿠니코의 내면은 점차 강박적이고 황폐하게 변해간다. 영화 '뺑소니'는 이 감독이 정교한 멜로 드라마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스릴러 장르의 연출에서도 나름의 역량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마지막 연출작은 '흐트러진 구름(Scattered Clouds, 1967)'이었다. 그러니까 영화 '뺑소니(Hit and Run, 1966)'는 그가 영화 경력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찍은 작품이 된다. 나루세 미키오의 잘 정돈된 전성기 멜로 드라마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가 병마로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감독의 다양한 영화 세계를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영화 '뺑소니'에서 동시대 일본 사회에 대한 깊이있는 관찰을 스릴러 장르에 녹여낸다. 아이의 비극적 죽음으로 얽히게 된 두 여성의 삶은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쿠니코 역을 연기한 타카미네 히데코의 열연은 오랫동안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이 영화는 타카미네 히데코와 나루세 미키오가 함께 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allcinema.net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