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아직 안된 거야?" 신문에
고개를 파묻은 남자는 아내를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묻는다. 여자의 속마음이 독백으로 흘러나온다. '매일 밥을 짓고, 미소된장국을
끓여서 낸다. 365일이 항상 똑같은 일상이다.' 하츠노스케(우에하라 켄 분)와 미치요(하라 세츠코 분) 부부는 권태기에
들어섰다. 집에서 남편의 관심사는 '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는 하루의 대부분을 식사 준비와 집안일로 동동거리면서 보낸다.
꼬리가 뭉툭한 길고양이 '유리'를 보살피는 것이 미치요의 유일한 낙이다. 아내 미치요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단지 남편의
무관심뿐만이 아니다. 증권 중개인으로 일하는 남편의 월급은 미치요를 돈에 쪼들리게 만든다.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는 일도 익숙하다.
건너편 집에는 술집 마담이 살고 있고, 좀도둑들이 출몰해서 살림살이를 훔쳐가기도 한다. 미치요는 지루한 결혼 생활과 하층민으로
전락해가는 자신의 삶에 염증을 느낀다.
나루세 미키오의 1951년작 영화 '밥(Meshi, Repast)'은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작가는 영화가 개봉된 그 해에 세상을 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후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을 여러 편
영화로 만들었다. 여성과 하층민의 가난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이 작가의 소설은 나루세 미키오를 만나 깊이있는 울림을 낸다.
영화 '밥'의 주인공 미치요는 목까지 차오르는 불만과 권태에 질식 직전이다. 그 때, 도쿄에서 남편의 조카 사토코가 온다.
사토코는 결혼을 재촉하는 고루한 아버지에게서 이제 막 도망나온 참이다. 그런데 이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는 미치요의 인내력을
시험한다. 집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남편에게 너무 스스럼없이 행동한다. 군식구가 하나 느니까 쌀독도 금새
바닥이 난다. 남편이란 작자는 아내의 고민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멋진 새 구두를 사고, 조카를 데리고 오사카 관광에
나선다.
이쯤 되면 관객은 미치요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고 결론내릴 법도 하다. 모처럼 도쿄의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미치요는 아내의 삶이 자신의 기대와는 어긋나 있음을 깨닫는다. 눈치 없는 조카 사토코를 도쿄에 바래다 준다는
명분으로 미치요도 친정으로 가버린다. 아차, 곰 같은 남편 하츠노스케도 무언가 마음이 뜨끔해진다. 아내는 그에게 단단히 화가 난
듯하다.
미치요는 남동생과 올케, 엄마가 있는 친정에서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한다. 그런데 미치요가 친정집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사토코의 그 철없고 제멋대로인 행동과 닮아있다. 나루세 미키오는 달라진 미치요를 친정집 방안의 정경으로 보여준다.
처음에 깔끔했던 방은 옷가지며 물건들이 제멋대로 놓여있다. 미치요는 늘어지게 잠을 자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돈도 아끼지 않고
쓴다. 아직까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내비치는 사촌과 유쾌한 데이트도 한다. 미치요는 이혼녀로 살아갈 이후의 삶을 가늠해
본다.
'당신의 존재는 나에게 괴로움을 더해주었을 뿐이에요.' 도쿄에서 미치요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그런데 편지를 부치러 갔다가 우체통 앞에서 망설인다. 헤어지는 것이 답일까? 혼자 살아가려면 직업이 있어야 한다.
패전 이후 일본의 경제는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는 중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당시 일본의 상황을 보여주는 상반되는 풍경들이
나온다. 하츠노스케가 접대받는 술집에서는 무희들의 화려한 공연이 펼쳐진다. 그런가 하면 직업 소개소를 찾아간 미치요의 눈 앞에서는
끝없이 줄을 선 구직자들이 보인다.
발길을 돌이켜 하릴없이 강둑을 걷는 미치요의 옆으로는 젊은 연인들이
웃으면서 지나간다. 미치요와 남편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미치요는 그곳에서 친구를 발견한다. 미치요의 친구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길바닥에서 신문을 팔고 있다. 전쟁터에서 실종된 남편을 기다린다는 이 친구는 혹시나 생환 소식이 나올까봐 아직까지
라디오를 듣는다고 했다. 남편의 부재로 곤궁한 친구의 모습은 이혼을 생각하는 미치요에게 근심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미치요에게 도쿄에서의 체류는 일종의 자아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과연 미치요는 가부장적 결혼 제도에 얽매인
피해자일까? 나루세 미키오는 오사카에 홀로 남은 하츠노스케의 모습을 통해 다르게 생각해 볼 만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자신을 이용하려는 증권 작전
세력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적어도 이 남자는 일을 하는 데 있어 분별력을 지닌 사람이다. 미치요에게 자신과 조카 사토코의
허물없는 사이를 오해받기는 했지만, 여자 문제에 있어서도 아내에 대한 신의를 지킬 줄 안다. 그는 도쿄의 새 일자리를 제안받고도
아내의 의향을 먼저 물어봐야겠다고 말한다. 하츠노스케의 그런 면면들은 그가 남편으로서 괜찮은 자질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하츠노스케는 아내를 만나러 도쿄에 온다. 미치요는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까? 원작 소설을 미완성으로 남긴 하야시 후미코가 어떤 결말을 원했을지는 알 수 없다. 제작사 도호(Toho)는
영화의 결말로 '이혼은 안된다'는 방침을 밀어붙였다(출처: ja.wikipedia.org). 어찌 되었든 간에 당시 일본 사회의
습속에서 '이혼'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다. 미치요는 결국 남편과 함께 오사카로 돌아가는 기차에 탄다. 이 결말은 한편으로는
여성 주인공이 인습적 가부장제와 불행한 결혼 생활에 자신을 억지로 구겨넣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미치요의 결정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라는 점을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다. 미치요는 기차의 창문 밖으로 차마 부치지 못한 결별의 편지를 찢어서
날려버린다. 그리고 옆자리의 잠든 남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이 아내는 이제 그 남자를 삶의 동반자로 새롭게 인식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흥행에 성공한 영화 '밥'으로 전후에 이어진 슬럼프에서 벗어나 전성기에 들어서는 문을 연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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