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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andmother(1970), Tribute: A Rockumentary(2001), Well Done, Now Sod Off(2000)

의식의 흐름에 따라 본 오늘의 영화들

 

The Grandmother(1970), 33분

Tribute: A Rockumentary(2001), 79분, 유튜브 검색 가능, 영어 자막.

Well Done, Now Sod Off(2000), 68분, 유튜브 검색 가능, 자막 없음.



1.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The Grandmother(1970)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자신이 편하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에 안주한다. 관성에 따르는 삶. 내가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장르의 영화들을 주로 파고 보는 것도 그러하다. 문득 오늘은 좀 불편하게 생각되는 것을 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는 데이비드 린치가 1970년에 만든 단편 'The Grandmother'. 33분 정도의 이 영화에는 린치 영감님의 각인이 쾅쾅 박혀있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이 단편에 나오는 그림은 린치가 직접 그린 것이다. 미술을 전공한 린치가 이미지를 다루는 재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초기 단편은 매우 흥미롭다.

  영화는 시작부터 범상치가 않다. 남자와 여자로 상징되는 두 개의 줄기가 뻗어나가면서 하나로 엉킨다. 그리고 숲속에서 기괴한 한쌍의 남녀가 나온다. 흰색의 분칠을 한 그들은 동물같은 소리를 낸다. 남자는 조커처럼 찢어진 입 모양을 하고 있다. 진짜 도입부부터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거기에다 음악도 으스스하다. 신경을 긁는듯한 음악은 영화 내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한 아이가 등장한다. 남자는 아이를 때리고 학대한다.

  아이는 아버지의 학대를 피할 방법이 없다. 엄마조차도 아이에게 관심이 없고, 남편이 가하는 학대에도 무감각하다. 어느 날 아이는 씨앗 자루를 발견한다. 침대에 흙을 뿌려 씨앗을 심고 열심히 가꾼다. 기이한 형상으로 자라난 덩어리에서 마침내 무언가가 나온다. 영화 '에이리언(Alien, 1979)'에서 에이리언 새끼가 나오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그로테스크한 식물의 출산(?) 장면이 나온다. 변변찮은 당시의 특수효과로도 린치는 자신만의 고유한 공포를 생성해낸다. 아이는 그렇게 'grandmother'를 만난다.

  린치가 만들어낸 이 grandmother의 형상은 결코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다. 꿈에 볼까 무섭지만, 아이에게 할머니는 유일한 위로로 자리한다. 아이가 할머니와 나누는 교감의 장면도 괴상한데, 서로 얼굴을 찔러가며 장난을 친다. 할머니에게 애착하는 아이를 보면서 관객이 안도하는 것도 잠시, 곧 린치의 비틀린 세계에 진정한 평화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스스로 목이 졸려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는 할머니를 보며 아이는 절규한다.
 
  영화 내내 아이의 부모가 내는 소리는 개 짖는 소리를 비롯해 괴이한 단음들이다. 짐승같은 부모는 아이를 학대하고, 아이의 내면은 파괴적인 영향을 받는다. 부모를 죽이는 아이의 상상은 애니메이션으로 살벌하게 묘사된다. 'The Grandmother'가 보여주는 가족의 모습은 고통과 불행의 집합체 같다. 영화 도입부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시된 남녀간의 상징적 결합은 근원적 죄와 폭력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러한 부모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출구없는 비극의 세계를 린치는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로 그려낸다.

  데이비드 린치에 대한 좋고 싫음을 떠나, 영화를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그를 피해갈 수가 없다. 린치는 영화가 가진 고유한 특질, 즉 '이미지'의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여전히 불편한 감독이지만, 이런 영화를 한 번 보고 나면 뭔가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 든다. 린치가 만들어내는 '매운맛' 이미지의 세계는 33분짜리 영화로도 관객을 충분히 흔들어 놓는다.


2. 밴드 사람들, 'Tribute: A Rockumentary(2001)'와 'Well Done, Now Sod Off(2000)'

  린치 영감님의 이미지 강타에 약간 얼얼해진 상태에서 그 다음으로 본 것은 Tribute 밴드에 대한 다큐이다. 'Tribute: A Rockumentary(2001)'는 유명 록 밴드를 열렬히 흠모해서 그들의 음악과 스타일을 그대로 모사하는 헌정 밴드 사람들을 담았다. Judas Priest, KISS, The Monkees, Queen을 따라 밴드를 결성한 일반인들이 있다. 직업도 다양하다. 고물상, 우편 배달부, 타이어 가게 주인... 그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 모두를 온전히 음악에 헌신한다.

  마치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의 미국 현실 버전 같은 이 다큐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짠한 생각만 든다. 결코 tribute band 활동을 하는 이들의 열정과 노력을 폄하하는 뜻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열성적인 그들의 모습을 비웃을 수 있는 관객은 드물 것이다. 다만 우리 모두는 '재능이 깡패'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저 그런, 대단치 않은 재능을 가진 일반인이 프로의 세계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무익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시도하고 노력한다. 누군가는 '짝퉁 밴드'라고 냉소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밴드의 공연을 따라다니는 팬들도 있다. 열정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tribute band 구성원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Well Done, Now Sod Off(2000)'는 음악에 대한 열정에 정치적 운동을 결합한 영국 밴드 'Chumbawamba'의 20여년 세월을 간략하게 스케치한다. 이 밴드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가? 그렇다면 인터넷에서 'Tubthumping'을 한 번 검색해 보라. 1997년에 밴드가 발표한 이 노래는 단번에 세계적인 대히트곡이 되었고, 스포츠 경기장의 응원가로 자리잡았다. 1982년에 결성되어 2012년에 해체되기까지 첨바왐바는 다채로운 활동을 보여주었다. 무정부주의자 밴드로 불릴 정도로 이들은 기존의 사회 질서와 제도에 반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음악에 담아서 불렀다. 다큐는 초창기 그들의 공연 모습과 TV 출연 장면들, 그리고 제작 당시의 활동 모습을 담았다.

  "첨바왐바는 음악적으로도 별로였고, 정치 운동 면에서도 시원찮았어요."

  다큐에 출연한 음악 평론가는 그렇게 신랄하게 까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큐 속 그들의 모습은 정치 운동을 하기 위해 음악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음악에 정치적 메시지를 곁들인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첨바왐바는 공산주의, 페미니즘, LGBT 운동, 평화 운동, 동물의 권익 보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회적 관심사를 보여주었다. 이 다큐를 보다 보면, 한 펑크 밴드가 상업성과 사회적 대의 명분 사이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갔음을 알게 된다. 이제는 해체된, 그러나 독특하고 강렬한 이력을 가진 밴드의 역사 속에 격동의 현대사도 겹쳐져 있다. 이렇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오늘 본 영화들에 대한 리뷰를 끝마친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사진 출처: eirewave.co.uk

 

***사진 출처: moviecha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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