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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보석, 잉그리드 버그만의 초기 출연작 4편

숨겨진 보석, 잉그리드 버그만의 초기 출연작 4편

1.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 Night, 1935), Gustaf Edgren 감독
2. 여자의 얼굴(A Woman’s Face, 1938), Gustaf Molander 감독
3. 간주곡(Intermezzo, 1939), Gregory Ratoff 감독
4. 6월의 밤(June Night, 1940), Per Lindberg 감독



  시작은 '발푸르기스의 밤(1935)'이었다. 'Foxtrot(2017)'과 'First Reformed(2017)'를 보고 무척 심드렁한 기분이 되었다. 'Foxtrot'은 작위적이었고, 'First Reformed'는 평범했다. 'First Reformed'는 폴 슈레이더가 이젠 영화를 그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한가지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있었다. 에단 호크가 꽤 좋은 배우라는 사실. 명료한 발성과 세밀한 감정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서 그 맑고 앳된 얼굴의 배우는 이제 이마에 주름 선명한 중년이 되었다. 같이 나이먹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더 주의깊게 보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매혹되지 않은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쓰는 일은 이제 하고 싶지가 않다. 그냥 머리나 식히자며 본 것이 잉그리드 버그만의 스웨덴 시절 작품 '발푸르기스의 밤(1935)'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버그만이 나오는 영화를 연달아 세 편을 보았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찍을 때 버그만의 나이가 스물이었다. 무성 영화 시절을 연상케 하는 다른 배우들의 정형화된 연기들 속에서 버그만은 홀로 생동감을 내뿜는다. 마치 흑백 영화 속에 유일하게 칼라로 찍힌 배우처럼 보인다. 비서로 일하는 레나(잉그리드 버그만 분)는 자신의 상사 요한을 사랑하게 된다. 유부남인 요한은 아이 갖기를 거부하는 아내에게 상심한 상태다. 요한의 아내는 남편 몰래 중절 수술을 받는데, 병원이 당국의 단속에 걸리면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다. 거기에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사기꾼은 신문사에 알리겠다고 돈을 요구하며 협박한다. 가정과 명성을 지키기 위해 사기꾼과 만난 요한은 뜻하지 않게 살인 사건에 말려드는데...

  유럽에서 전승되는 민속 축제인 발푸르기스의 밤은 봄의 생명력을 찬미하는 큰 축제이다. 영화는 스웨덴의 출산율 감소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시작한다. 스웨덴 인구복지 협회에서 만든 것 같은 이 영화는 모성과 출산이 가지는 가치를 크게 부각시킨다. 요한의 아내는 인생을 즐기는 데에 아이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이 여성 캐릭터는 매우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낙태'를 한다는 것은 모성에 대한 거부이며, 그러한 여성은 바람직한 사회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요한의 아내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죽음으로 댓가를 치룬다. 이후에 결혼한 레나가 아이를 요한에게 안겨주는 마지막 장면은 당시 스웨덴 사회가 지닌 여성과 가정에 대한 보수적 관점을 반영한다.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유부남을 사랑하게 된 젊은 여성의 내밀한 감정을 잘 보여주었던 버그만은 1936년에 Gustaf Molander 감독의 'Intermezzo'를 찍는다. 유부남 바이올리니스를 사랑하게 되는 피아니스트 역이었다. 이 영화는 버그만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헐리우드의 유명 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이 'Intermezzo'에 나온 버그만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1939년, 셀즈닉은 버그만을 주연으로 같은 제목의 영화를 제작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서 애쉴리 역을 연기했던 레슬리 하워드가 버그만의 상대역을 맡았다. '시민 케인(1941)'의 전설적인 촬영 감독 그레그 톨랜드가 담아낸 빼어난 화면은 버그만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명하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홀거는 딸의 피아노 선생인 아니타의 재능과 미모에 반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연주 여행을 떠나지만, 아니타는 홀거가 아이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결국 아니타는 홀거를 떠나고, 남자는 가정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레슬리 하워드와 잉그리그 버그만의 연주 연기였다. 악기를 배운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주 장면이 나오면 배우들이 어떻게 그 장면을 연기하는지 유심히 보게 된다. '간주곡'에서 레슬리 하워드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그런데 활쓰기와 지판을 짚는 법이 꽤 정확해서 좀 놀랐다. 그건 피아노를 치는 버그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찾아보니, 두 배우에게 연주자들이 붙어서 특훈을 시켰던 모양이다. 물론 배우들이 실제 연주했던 것은 아니고, '연기'로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연기에도 상당한 기교와 노력이 필요한 것인데, 역시 뛰어난 배우들은 뭔가 확실히 달랐다.

  '간주곡'의 버그만은 연주 연기 뿐만 아니라 영어 대사도 잘 소화해 낸다. 제작자 셀즈닉은 버그만이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할까봐 걱정을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스크린을 압도하는 이 여배우의 미모와 재능은 일종의 계시처럼 보인다. 영화 '간주곡'은 스웨덴 여배우 버그만의 성공적인 헐리우드 진출작이 되었다. 향후 10년 동안 버그만은 헐리우드를 지배하는 아이콘으로 자리한다.

  '여자의 얼굴(A Woman’s Face, 1938)'은 버그만의 존재를 셀즈닉에게 알려준 1936년작 'Intermezzo'의 구스타프 몰란더 감독과 찍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버그만의 필모그래피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버그만이 화상 흉터로 일그러진 여자 사기꾼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부유층의 불륜과 범죄를 캐내어 협박하는 사기꾼 안나는 뛰어난 외과의사를 만나 성형 수술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과거의 그림자가 안나를 끈질기게 따라온다.

  틀니를 비롯해 특수분장을 하고 험악한 얼굴의 범죄자를 연기한 버그만의 모습은 매우 생소하게 보인다. 버그만이 연기한 안나는 그저 그런 사기꾼이 아니라 노회한 동료 범죄자들을 이끄는 강인한 보스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버그만은 거칠고 높은 톤으로 발성한다. 이 여배우에게 스웨덴 시절의 영화들은 다양한 역할을 통해 연기력을 연마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6월의 밤(June Night, 1940)'은 이제 버그만의 연기 수련기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버그만은 자신이 가진 고유한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시골 처녀 케르스틴은 연인의 총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떠들썩한 재판을 거치면서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된 케르스틴은 낯선 도시 스톡홀름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조용히 살려는 케르스틴의 바램은 찾아온 남자친구와 기자의 추적으로 깨어질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된 사랑이 케르스틴을 장밋빛 미래로 이끈다.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 여인이 변심한 것을 견딜 수 없는 남자는 총을 쏜다. 케르스틴을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매력에 빠져든다. 여성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들렀던 병원의 간호사는 살 곳을 찾는 케르스틴에게 자신의 거처로 안내한다. 심지어 케르스틴의 행방을 쫓는 기자마저 그 모습에 매혹되어 잊지 못한다. 그보다 더 심한 것은 말도 나누지 않고 얼굴 몇 번 본 것뿐인데도 이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간호사의 약혼자인 의사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연인을 내팽개치고 케르스틴과 떠나버린다...

  '6월의 밤'에서 버그만은 매혹 그 자체를 보여준다. 엉성한 내러티브와 몰입되지 않는 상대 배우들의 외모와 연기,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오직 '잉그리드 버그만' 의 존재 때문이다. 정말이지 영화 4편을 보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버그만이 가진 강렬하고도 아름다운 아우라는 말 그대로 화면에 흘러 넘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떠들썩한 스캔들과 결국은 이혼으로 끝난 결혼 생활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버그만의 놀라운 영화들을 더 많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아쉬움을 스웨덴 시절에 찍었던 초창기 영화들은 충분히 달래준다. 숨겨진 보석, 그 영화들은 후대의 팬들을 위해 남겨둔 버그만의 깜짝 선물처럼 느껴진다. 


*사진 출처: torontofilmsociety.com  'Intermezzo(1939)'의 레슬리 하워드와 잉그리드 버그만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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