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니키타 미할코프의 완성된 영화 세계, 기계식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소품(Неоконченная пьеса для механического пианино, 1977)

 

기계식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소품(Неоконченная пьеса для механического пианино, An Unfinished Piece for Mechanical Piano, 1977)


  1923년, 러시아에서 희곡 대본 하나가 발견된다. 러시아의 위대한 극작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것으로 이전까지 출판되지 않은 미발표 희곡이었다. 체호프가 18세 때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희곡은 니키타 미할코프(Nikita Mikhalkov)를 매료시켰다. 그는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로 하고, 원작 희곡을 새롭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작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체호프의 향기를 느끼면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감성이 뒤섞여 있음을 알게 된다. 대개는 '플라토노프(Platonov)'로 공연되는, 또는 '아버지 없는(Fatherlessness)'이란 제목을 가진 4막의 희곡은 '기계식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소품'이란 영화로 재탄생했다. 체호프의 세계와 미할코프의 영화적 감수성이 하이브리드된 이 독특한 영화는 미할코프의 대표작이 되었다.

  미할코프는 원작의 등장 인물들을 대폭 축소하고, 결말도 바꾸어 버렸다. 또한 원작에는 없는 기계식 피아노(저장된 악보에 따라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노)를 중요한 소품으로 배치시킨다. 19세기 러시아의 어느 교외 시골 별장에서 펼쳐지는 몰락 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에는 인생의 부조리와 우울, 통렬한 시대 비판이 들어 있다. 장군의 미망인 안나는 자신의 교외 별장에 지인들을 초대한다. 안나의 의붓 아들 세르게이는 소피아와 이제 막 결혼했다. 안나의 별장을 소유하고 있는 채권자 페트린, 이웃의 사업가 포르피리, 마을의 유일한 의사 니콜라이, 니콜라이의 여동생 샤샤와 남편 플라토노프, 니콜라이와 샤샤의 아버지 파벨, 이웃 셰르부크와 그의 두 딸과 조카가 별장의 손님들이다.  

  원작 희곡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야기의 주인공은 플라토노프이다. 학교 교사인 그는 안나의 별장에 온 소피아를 보고 놀란다. 대학 시절의 연인이었던 소피아는 그를 떠났고, 플라토노프는 심한 절망감에 대학을 그만 두고 평범한 교사가 되었다. 소피아의 남편은 세상 물정 모르는 백면 서생과 같은 인물로 플라토노프에게 조롱의 대상이 된다. 플라토노프는 소피아에게 다시금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거기에 플라토노프와 한 때 내연 관계에 있었던 안나, 그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볼 뿐인 플라토노프의 아내 샤샤가 있다. 별장에 온 이들은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며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플라토노프는 자신을 비롯해 그곳에 모인 이들의 모습에 염증과 혐오를 느낀다. 니콜라이가 아픈 아내의 진료를 간청하는 마을 농부를 귀찮다며 돌려보내자 플라토노프의 독설이 폭발한다.

  이 시골 별장에 모인 이들의 삶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고 뒤틀려 있다. 햄릿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견디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리는 것처럼 플라토노프도 그렇게 한다. 그는 니콜라이가 마을의 유일한 의사로서의 직무를 저버리고 그저 안락한 삶만을 추구한다고 비난한다. 부유한 이웃 사업가 포르피리에게는 그가 축재한 재산이 정당한 것이냐고 되묻는다. 가난한 농민에 대한 연민을 보이는 세르게이를 그저 책으로만 세상을 배운 무능한 지식인이라고 비웃는다. 안나에게 구애하는 페트린을 향해서는 늙음을 상기시킨다. 이렇게 플라토노프는 그곳 사람들을 들쑤시고 상처를 헤집으며 조롱한다. 물론 그 대상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니키타 미할코프는 플라토노프의 눈을 통해 몰락해가는 19세기의 러시아와 당시 지배계급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폐기의 수순을 밝고 있는 구시대의 잔재이다. 사람이 연주를 할 수 없는, 자동 입력된 악보에 따라 반복적으로 소리를 낼 뿐인 기계식 피아노의 존재는 그에 대한 극명한 은유이다. 이 영화에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만 또 다른 은유적 상징의 인물은 파벨 노인이다. 의사 니콜라이와 플라토노프의 아내 샤샤의 아버지인 파벨은 늘 잠에 빠져 있다. 아무 데서나 졸고 있는 파벨을 주위 사람들은 매번 흔들어 깨우지만, 그는 다시 잠들고 만다. 원작 희곡의 또 다른 제목 'Fatherlessness'의 뜻은 가부장의 부재인 동시에 시대 정신의 부재, 가야할 방향을 알지 못하는 제정 러시아의 운명에 대한 극명한 비유인 셈이다.
 
  등장 인물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다. 장군 미망인이라는 허울 뿐인 이름의 안나는 주요 재산을 저당잡혀 있고, 늙은 채권자 페트린의 구애를 마지못해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이다. 그러면서도 플라토노프에게 추파를 보낸다. 플라토노프는 주변 사람들의 무능과 부도덕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은 유부녀가 된 과거의 연인 소피아를 유혹한다. 백치 같은 소피아의 남편 세르게이는 징징거리면서 의붓 엄마 안나에게 달려간다. 이 기가 막힌 소극(笑劇)은 모든 상황에 극심한 환멸을 느낀 플라토노프가 잠들어 있는 별장의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다가 갑자기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에서 비극으로 전환된다.   

  체호프의 원작은 소피아가 플라토노프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만, 미할코프는 그런 식의 비극적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플라토노프가 죽으려고 몸을 던진 강물은 고작 무릎 높이 정도의 수위였다. 물론 죽을 결심을 한 그는 강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아내 샤샤는 그런 플라토노프에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며 사랑만이 인생의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상기시킨다. 비극적이고 허무하게 닫힌 세계는 미할코프의 열린 긍정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 '기계식 피아노에 대한 미완성 소품'에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구시대 러시아 상류층의 우울한 초상이 담겨있다. 새벽에 소피아를 만나고 별장으로 들어가려는 플라토노프는 열리지 않는 문을 잡고 씨름한다. 아내와 플라토노프의 밀회 장면을 목격한 세르게이는 떠나려고 하지만 그는 빼려고 했던 결혼 반지를 그대로 끼고 마차에서 잠든다. 플라토노프의 무위로 끝난 자살 소동이 마무리될 무렵 동이 터온다. 별장의 사람들이 강으로 달려가는 북새통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부드러운 아침 햇살을 받는 이는 이웃 셰르부크의 철없는 어린 조카 페치카이다. 아마도 새로운 러시아는 기성 세대의 어리석음과 악덕에 물들지 않은 그 다음 세대의 과업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배우들의 케미스트리와 아주 자연스러운 연출이 눈에 띈다. 니키타 미할코프는 그런 결과물을 얻기 위해 두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배우들과 그 가족들을 촬영 장소인 오카 강가의 푸쉬치노에서 지내도록 했다. 배우들은 서로 매우 친해졌으며, 그들 모두는 시골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영화를 위해 숙성된 시간은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 미할코프는 영화 속에서 의사 니콜라이 역을 연기했는데, 그는 연기자로서도 나무랄 데 없는 실력을 보여준다. 연기자와 감독으로서 자신의 경력을 빛냈던 그는 사업가로도 크게 성공해서 러시아 재벌급의 부를 소유하고 있다. 사주로 치면 관운(官運)과 재물운의 끝판왕인 이 행운아 감독의 영화에는 강렬한 자신만의 색깔이 있다. 십대 체호프의 숙성되지 않은 문학 세계는 미할코프의 손을 거치면서 놀라운 공명을 만들어 내는 영화로 재탄생했다. 어떤 면에서 '기계식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소품'은 체호프의 비어있고 불완전한 소품을 비로소 완성시킨 미할코프의 역작인 셈이다. 


*사진 출처: domkino.tv  영화 '기계식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소품'에서 의사 니콜라이를 연기한 니키타 미할코프 감독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