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잡담; The Dig(2021), Laura(1944), The Narrow Margin(1952)
'The Dig(2021)'는 러닝타임이 2시간 가까이 된다. 영화를 보기 시작한 지 20분쯤 되었을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덤 파는 이야기로 어떻게 나머지 1시간 반을 채울 것인가... 초반부에 이미 주인공들이 발굴하려는 무덤의 역사적 가치가
명백해진 상태였다. 이 영화의 촬영은 말 그대로 '때깔'좋게 나왔다. 문제는 내러티브의 때깔도 그러하냐는 것이다. 실망스럽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병든 여자와 늙은 남자의 로맨스는 그다지 효용성이 없으므로, 다른 수를 써야만 했다. 아무래도 실존했던 인물들을 다루는 것은
까다롭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허구의 젊은 남녀를 투입했다. 이 맥아리 없는 영화는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썩어 없어질 지상의 모든 것과 대비되는 영속성을 가진 유적, 그리고 그것을 위해 투신하는 부유한 상류층
여성과 발굴 탐험가. 이 영화에서 어떤 매력을 찾는 것은 굉장히 힘든 작업이다. 한가지 특색이 있다면 사운드 편집을 들 수
있겠다. 인물들이 아무 말 없이 있는 장면에서 뒤따르는 다른 장면의 대화들이 겹쳐지는 것이 그러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실망스런 영화를 보고나서 내가 언제나 찾는 영화는 헐리우드 클래식이다.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1944년작
'로라(Laura)'는 매력적인 여배우 진 티어니가 나온다. 영화는 형사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로라는 총에 맞아
살해당했다. 형사 맥퍼슨은 로라의 살인범을 찾으려고 수사 중이다. 그는 로라의 집 거실에 걸린 로라의 아름다운 초상화에 매혹된다.
여배우 대신에 초상화가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한다. 어쩌면 맥퍼슨만 로라의 초상화에 반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매력적인 여인 로라의 모습에 관객들도 함께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초상화 앞에 잠들어 있던 맥퍼슨 앞에 '짠'하고 나타난다. 그렇다면 죽은 여자는
누구이며, 왜 살해당했을까?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흘러간다. 나는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서야 이 영화를 내가 아주 오래전에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범인이 누구인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지막에 범인이 'Good bye Laura. Good
bye my love'라고 애절하게 말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런 영화는 두 번을 보아도
결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로라'에서 같이 공연했던 진 티어니와 다나 앤드류스는 역시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Where the Sidewalk Ends(1950)'에서도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 그 영화도 좋다.
예전에 본 영화인지 모르고 또 보았던 영화로는 'The Narrow Margin(1952)'이 있다. 리처드 플레이셔 감독의 이
필름 느와르는 '기차'라는 협소한 공간을 활용하는 짜임새 있는 내러티브가 돋보인다. 이 영화는 일반적으로 B급 영화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지만, 의외로 여성 캐릭터들의 전복적 설정을 비롯해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다. 영화가 끝나기 10분 전에서야 이 영화를
20년 전에 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본 영화를 그렇게 기억못하고 또 보는가, 라고 묻는 독자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충분히 젊은 나이일 것이다. 학생 시절에 영민하다는 소릴 꽤 들었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된다. 아무튼 이 잡담의 결론은
이렇다. 'The Dig'를 본 시간은 정말로 아깝지만, 두 번 본 'Laura'와 'The Narrow Margin'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것.
*사진 출처: face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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