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RKO 영화사 시절의 로버트 미첨(Robert Mitchum)의 초상 2부

1. Rachel and the Stranger(1948), 노만 포스터 감독

2. Where Danger Lives(1950), 존 패로 감독

3. His Kind of Woman(1951), 존 패로 감독

4. Angel Face(1953), 오토 프레밍거 감독

5. The Lusty Men(1953), 니콜라스 레이 감독



3. 가장 미첨다운 것, The Lusty Men(1953)

  니콜라스 레이 감독과 함께 한 'The Lusty Men(1953)'은 로버트 미첨이란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선사한다. 웨스턴 장르는 전쟁물과 함께 미첨의 주요한 필모그래피를 장식한다. 니콜라스 레이 감독은 관객들을 미국 로데오 경기장 한복판으로 초대한다. 이름난 로데오 선수로 살아온 제프(로버트 미첨 분)는 부상으로 은퇴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집을 장만하기 위해 애쓰는 가난한 웨스 부부와 알게 된다. 웨스(아서 케네디 분)는 제프에게서 로데오 기술을 배워 돈을 벌 궁리를 하지만, 아내 루이즈(수잔 헤이워드 분)는 위험한 일이라며 내켜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데오 경기에서 얻는 돈은 이 부부를 로데오의 세계로 자석처럼 끌어들인다. 제프의 도움으로 로데오 경기의 실력자로 부상한 웨스는 점차 거만해지고 아내에게도 소홀해진다. 급기야 수입을 나누는 동업자 제프에게 모욕을 주기에 이르고 제프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로데오 경기에 참가하는데...

  '러스티 맨'을 보다 보면 니콜라스 레이가 '이유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 1955)'에서 보여준 자동차 경주 장면의 역동성을 떠올리게 된다. 레이는 로데오 경기장의 흥분과 열기를 현장감 있게 담아낸다. 이 감독에게는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거친 남자들의 세계, 미첨은 그 누구보다 이 영화에 잘 어울린다. 한때는 로데오의 지배자였지만, 이제는 은퇴한 제프의 내면에는 로데오에 대한 열정이 잔불처럼 남아있다. 어쩌면 그것은 풋내기 로데오 참가자 웨스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한편으로는 웨스의 아내 루이즈에 대한 연정도 깔려있다. 니콜라스 레이는 이 상처받은 로데오의 남자 제프와 함께 로데오 경기장에 얽매인 여러 인간 군상을 다큐멘터리처럼 펼쳐놓는다.
 
  부상과 죽음의 위험이 있는 로데오 경기장을 떠나지 못하는 선수들, 경기장의 뒷편에서는 언제나 내기 도박과 떠들썩한 파티가 벌어진다. 엄청난 돈이 오가는 로데오의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은 가난과 죽음으로 마감하는 로데오의 노장, 잘 나가는 스타 선수를 따라다니는 파티걸들, 그리고 로데오 선수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등장하는 로데오 광대(rodeo clown)를 비롯해 경기장의 일거리로 먹고 사는 사람들... 그렇게 '러스티 맨'은 '로데오 경기장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로버트 미첨은 로데오에 매혹된 한 남자의 쓸쓸한 인생을 연기한다. 결국 로데오에 환멸을 느낀 웨스 부부가 정착할 집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달리, 제프는 돌아가지 못한다.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방랑자의 운명은 로버트 미첨이 연기하는 캐릭터들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정착과 휴식을 갈구하지만, 어느새 그는 떠나는 길 위에 서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은 노만 포스터 감독의 'Rachel and the Stranger(1948)'이다.


4. 낭만적인 방랑자, Rachel and the Stranger(1948)

  '레이첼과 이방인'은 미국 초기 개척사의 일부분인 'indentured servant' 제도를 소재로 한 독특한 서부극이다. '계약 하인제'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이 제도는 실질적인 노예 제도나 다름없었다. 정해진 연한 동안 지불된 금액에 따라 주인에게 종속되어 일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극빈층의 백인들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새경을 받고 일하는 머슴과도 같은 이들은 초창기 미국으로 이주한 영국 정착민들에게 소중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가혹한 처우는 점차 제도의 이탈자를 만들어 냈고, 그것은 흑인 노예에 대한 폭발적 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indentured servant'로 일하는 여성의 경우는 노동력 뿐만 아니라 성적 착취에 대한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식민지 정착촌의 농부 데이비드(윌리엄 홀덴 분)는 아내를 잃은 홀아비로 어린 아들 데이비와 살고 있다. 그는 살림과 양육을 도와줄 여자를 찾기 위해 마을 원로의 도움을 받는다. '레이첼'이란 이름의 여성을 하인으로 쓰고자 명목상으로 결혼을 한 데이비드. 그는 오랜 친구 짐(로버트 미첨 분)의 방문을 받는데, 짐은 레이첼에게 호감을 느낀다. 레이첼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지만, 데이비드는 죽은 아내만을 그리워하고 꼬마는 자신을 돈에 팔려온 '노예'라며 무시한다. 그런 레이첼에게 짐은 자신이 돈을 지불하겠다며 함께 떠나자고 하는데...

  영화가 시작되면 로버트 미첨이 기타를 들고 노래하면서 등장한다. 사냥꾼의 복장으로 등장하는 그가 들려주는 노래는 가수 뺨칠 정도로 감미롭다. 그는 영화 속에서 로레타 영이 연기한 레이첼과 함께 노래를 몇 곡 더 부르는데, 그런 장면들은 그가 가진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을 입증한다. 짐은 홀아비와 꼬마에게 냉대받는 레이첼에게 인간적인 온기를 선물한다. 레이첼의 낡은 옷을 보고 옷감을 끊어와 새옷을 만들어 입게 한다. 친구 데이비드에게는 레이첼을 그렇게 내버려둘 거면 자신에게 넘기라고 호기롭게 말한다.

  물론 레이첼은 두 남자가 자신을 사고 파는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레이첼은 신분적 제약에 갇혀있는 여성이기는 하지만, 자존감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이 강인한 식민지 시대의 여성은 거친 정착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총 쓰는 법을 연마한다. 가축을 노리는 야생 동물과 원주민 도적단에게 당당하게 맞선다. 레이첼은 스스로의 힘으로 한 가족의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 데이비드는 마침내 레이첼을 아내로 받아들이고, 꼬마 데이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레이첼에게 순종한다. 거기에 짐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는 방랑자로서 다시 길을 떠난다. 원주민 토벌대의 일원으로 합류하는 짐의 뒷모습과 함께 영화는 끝을 맺는다.

  정착민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원주민에 대한 악의적 묘사가 있기는 하지만, '레이첼과 이방인'은 꽤 흥미로운 영화보기의 경험을 제공한다. 헐리우드 고전기를 대표하는 세 명의 배우들의 멋진 공연이 있고, 무엇보다 로버트 미첨의 낭만적인 방랑자 연기가 돋보인다. 미첨의 RKO 시절은 1955년, 휴즈의 영화사 매각과 함께 끝난다. 무려 7년에 걸친 편집증 제작자의 난동은 미국 영화사에 기이한 흔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 시기의 RKO 영화사에서 미첨이 쌓은 필모그래피는 재능있는 배우의 흥미로운 궤적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The Lusty Men(1953)'


**사진 출처: tcm.com          'Rachel and the Stranger(1948)'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