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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전설에 담긴 전쟁의 광기, 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A Legend or Was It?, 1963)

 

  평화로운 홋카이도의 어느 농촌 마을. 밭일을 하던 농부들은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마을 어귀에서는 바퀴가 빠진 트럭을 보고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우러 나섰다. 그런데 이렇게 인정과 활기가 넘치는 이 마을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화면 위로 흐르는 남성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마을의 과거로 떠나는 신호탄이 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A Legend or Was It?, 1963)'은 종전 직전에 벌어진 농촌 마을의 비극을 보여준다. 가톨릭의 미사 전례곡 첫 부분인 '주여,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소서(慈悲頌, Kyrie)'가 비감하게 흐르는 도입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 영화는 음악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영화 전편에 걸쳐 불길하고 음울하게 들리는 배경 음악은 '무쿠리(ムックリ, Mukkuri, 아이누족의 전통 악기)'가 쓰였다. 그 음악과 함께 영화는 컬러 화면의 현재에서 흑백의 과거로 곧바로 진입한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홋카이도의 산골 마을에 젊은 군인이 귀향한다. 4년만에 전장에서 돌아오는 군인의 이름은 히데유키. 그는 소노베 집안의 장남이다. 히데유키는 마을 입구에서 말을 탄 상이군인과 마주친다. 전쟁에서 왼손을 잃은 그 남자 코이치는 히데유키의 여동생 키에코에게 청혼을 한 터였다. 히데유키는 코이치를 한눈에 알아본다. 코이치는 중국에서 복무했던 히데유키의 부대 상관이었다. 히데유키는 코이치가 아녀자를 강간하고 살해했던 만행을 떠올린다. 그런 잔학한 남자와 여동생을 결혼시킬 수는 없다. 코이치가 싫은 것은 키에코도 마찬가지. 하지만 소노베 가족에게 그 청혼의 거절은 생존과도 직결된다. 도쿄의 공습을 피해 홋카이도로 온 소노베 일가는 이장 타카모리의 도움을 받았다. 코이치는 바로 그 타카모리의 아들이다. 이제 자존감에 상처받은 코이치는 비열한 복수극을 시작한다.

  동시대의 오즈 야스지로가 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현대극으로, 나루세 미키오가 여성과 가족의 일상을 세밀하게 파고들 때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비판적 사회극을 꾸준히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스물 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Twenty-Four Eyes, 1954)'는 소학교의 여선생과 제자들에게 닥친 전쟁의 여파를 통렬하게 그려낸다. '사투의 전설(死闘の伝説, 1963)'은 어떤 면에서 그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종전을 앞둔 홋카이도의 산골 마을에 폭력과 광기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스며든다. 말을 타고 마을 곳곳을 순찰하듯 돌아다니는 코이치는 군국주의의 화신이나 다름없다. 그는 소노베 일가가 마을의 농작물을 훔치고 다른 농부들의 밭을 망치는 원흉이라고 소문을 퍼뜨리며 마을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렇게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 갈등은 패색이 짙어가는 일본의 전황과 겹치며 예기치 못한 파국을 불러온다.

  키에코를 덮치려는 코이치가 우발적으로 죽게 되면서 이 마을의 끔찍한 핏빛 전설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들의 죽음에 광분한 이장은 마을 주민들에게 소노베 일가의 막내 아들을 죽이도록 명령한다. 마을 주민들이 보여주는 분노와 살기는 기실 제국주의 일본에게 향해야하는 것이 맞다. 내레이터는 그 마을에서 11명의 남자가 전장에서 죽었다고 일러준다. 자식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실성한 주민은 총을 들고 폭도의 무리에 합류한다. 그들의 절망과 고통은 무지와 뒤엉키며 '소노베 일가'라는 희생양을 만들어 낸다. 가난하고 힘없는 외지인 소노베 일가는 이제 공공의 적으로 척살의 대상이 된다.

  "죽일 테면 죽이라지.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 "

  어머니는 자신과 딸을 죽이겠다고 몰려오는 광란의 무리를 응시한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산골의 비좁은 길은 살육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펼쳐보이는 이 지옥도는 전쟁의 광기로 마비된 일본인들의 내적 폐허에 대한 은유이다. 마을 사람들이 저지른 학살은 침묵의 대상이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패배한 전쟁은 일본인들에게 입에 올리는 것이 수치스러운 금기였다.

  흑백 화면 속의 끔찍했던 마을의 과거는 이제 컬러로 바뀐다. 힘을 합쳐 바퀴 빠진 트럭을 끌어낸 마을 사람들은 웃으며 헤어진다. 그들은 광란의 기억에서 필사적으로 도주했고, 망각이라는 선물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일본의 진정한 패배가 반성없는 망각에 있음을 지적한다. 무고한 피가 스며든 홋카이도의 산천은 핏빛 전설을 품고 있다. 그 전설을 잊지 않고 들려주는 일. 영화의 사회적 책무란 그런 것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아이누 원주민의 전통 악기 무쿠리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영화 리뷰
먼 구름(遠い雲, The Tattered Wings, 195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tattered-wings-1955.html

위험은 가까이에(風前の灯, Danger Stalks Near,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danger-stalks-near-1957.html

봄날이여 안녕(惜春鳥, Farewell to Spring,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arewell-to-spring-1959.html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thus-another-day-19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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