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어묵으로 죽이려 드는구나!"
심통 가득한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점심에 내놓은 어묵 반찬을 타박한다. 속이 불편한 자신에게 소화가 어려운 어묵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정작 아침에 이 시어머니는 자식들 먹이느라 좋은 어묵은 못먹어봤다는 과거를 늘어놓았다.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사실
좀 많이 이상하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낸 신문대며, 두부 사온 것을 가지고 칼같이 며느리에게 돈을 받아낸다. 심지어 시어머니는
방에 따로 자신이 먹을 것을 쟁여둔다. 며느리 유리코는 어린 아들이 달걀말이를 먹고 싶다고 말하자 계란이 없다고 하는데, 아들은
할머니방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시어머니 찬장에서 계란 하나를 꺼내오면서 계란값을 넣어둔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1957년작 '위험은 가까이에(風前の灯, Danger Stalks Near, 1957)'는 코미디와 스릴러가 결합된 독특한
서민극이다. 영화는 두 명의 불량배와 그들의 협박에 못이겨 따라나선 가난한 고학생이 교외 주택에 강도짓을 모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알부자로 소문난 시어머니 테츠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 유리코(타카미네 히데코 분). 유리코의 시어머니는
남편의 계모로 그 고약한 성질과 인색함 때문에 유리코도 남편도 무척 싫어한다. 그러나 구두 상점에서 일하면서 빠듯한 월급으로
겨우 살아가는 그들 부부에게 시어머니와의 동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들이 사는 집은 시어머니 소유이다. 강도들은 카네시게가
출근한 뒤에 고부와 아이가 있는 틈을 타 강도짓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진다. 집에는 세입자 아가씨가
태워먹은 다다미 짜맞추느라 점원들이 드나들고, 우편배달부, 유리코의 여동생들, 남편의 조카를 비롯해 새로운 세입자의 방문으로
북적인다. 강도들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된다. 이 어설픈 강도단은 멀리 보이는 언덕배기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을 뿐이다. 한편,
그들이 노리는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돈에 찌들려 있으며,
그래서 그 무엇보다 돈을 열렬히 원한다.
유리코의 여동생 사쿠라는 놀고 먹는 연하 남편과 사느라 지쳐있다.
언니네 내외가 카메라 경품에 당첨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찾아와 5만엔 짜리 카메라 팔면 1만엔은 자길 달라고 애원한다. 남편의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살고 있는 유리코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시어머니는 아들 내외가 자신의 집에 얹혀 사는 것을 이유로 온갖
위세를 부리며 며느리 유리코를 힘들게 한다. 투박한 안경을 끼고 나온 타카미네 히데코의 삶에 찌든 주부 연기는 남다르다. 이
여배우는 소시민의 정서가 체화된 연기를 보여준다. 며느리라고 어디 당하고만 있을까? 유리코는 자신이 선물받은 신발을 주며
성질부리는 시어머니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하지만, 시어머니는 늙은이가 굽높은 신발 신고 넘어져 다치길 바라는 거냐며 소리지른다.
"네, 어머니가 신발 신고 넘어져 죽어버렸으면 좋겠네요. 진심으로요."
정말로 유리코 부부는 시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들 부부는 시어머니가 모은 돈과 집을 물려받을 것을 생각하며 견딘다.
돈에 찌들린 가족 구성원들이 사는 이 집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혈투는 결코 코미디라고 할 수 없다. 돈, 돈, 돈...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종전 후 재건의 시기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가 얼마나 물질에 종속되었는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의 일본어
제목은 '풍전등화', 번역하면 '바람 앞의 촛불'이다. 이 가족에게 닥친 위험은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강도가 아니라, 돈에 마비된
사고방식에 있다. 교외에 자리한 가족의 집은 방에 걸린 밀레의 '만종' 그림처럼 평온하고 아늑해 보이지만, 그 그림은 진짜
강도인 조카의 총알에 박살이 난다. 그렇게 소시민적 삶의 이상에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은
가까이에'는 소소한 웃음과 약간의 긴장을 선사하는 소품과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 만든
서민극에는 나름의 강렬한 풍자가 있다. 유리코의 남편 이름은 '카네시게(金重)'인데, 돈을 잘 벌어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그러나 어려운 형편에 대학도 나오지 못했고, 그래서 좋은 직업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말주변도 없어서 신발도 제대로
팔지도 못한다. '백합'을 뜻하는 유리코(百合子)를 비롯해 둘째 여동생 사쿠라(さくら, 벚꽃), 막내 아야메(あやめ, 붓꽃)의
이름도 역설적이다. 그들 자매의 삶은 아름다운 꽃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 막내 아야메는 돈이 많다는 이유로 어묵집 아들과 사귄다.
돈에 찌들린 일가족이 보여주는 이 좌충우돌 코미디를 보는 것은 결코 시간낭비는 아니다. 이 영화가 치열하고 처절하게 소시민의
내면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댓글
댓글 쓰기